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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근 : 최강 몬스터즈 No.38 ★ 그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Araboza

시사맨 2024. 5. 17.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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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근은 대한민국 야구의 전설적인 선수로, 그의 활약은 한때 최강 몬스터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1941년 10월 30일에 교토부 교토시 우쿄구에서 태어났으며, 본적은 경상남도 진양군 미천면입니다. 국적은 대한민국이며, 신체적으로는 키가 180cm이고 체중은 82kg입니다. 그의 혈액형은 A형이며, 종교는 무종교입니다. 가족으로는 아버지인 김찬숙과 어머니인 이계수, 그리고 세 남매와 네 누이 중 여섯째로 태어난 가운데에 있습니다. 그는 배우자인 오효순과의 사이에 아들 둘과 딸 둘을 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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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근은 교토시립 시조중학교와 교토부립 가쓰라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동아대학교에서 명예 학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그의 포지션은 투수와 1루수이며, 투타 스타일은 좌투좌타입니다. 그의 소속팀으로는 교통부와 기업은행이 있습니다. 김성근은 1962년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활약했습니다. 후에 그는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서 코치 카운슬러로 활약했으며, 응원가는 라나에로스포의 "사랑해"입니다. 그는 또한 체육훈장 기린장을 수여받은 바 있습니다.

 

김성근은 한국 야구의 전설적인 선수 및 감독으로 그의 커리어는 다양한 이정표를 가졌습니다. 전 KBO 리그 팀인 OB 베어스, 태평양 돌핀스, 삼성 라이온즈, 쌍방울 레이더스, LG 트윈스, SK 와이번스, 한화 이글스에서 감독을 맡았으며, 이후 일본프로야구 치바 롯데 마린즈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프런트 및 코치로 활약했습니다.

김성근은 2022년 10월 16일, 지도자로서의 50년을 마무리하고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그는 2022 시즌을 기준으로 80세(실제 만 나이로는 81세를 보름 앞둔 우리나이 82세)로 일본프로야구 전체 구단 중 최고령의 지도자였습니다.

 

김성근의 학창시절은 그의 미래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일본 교토에서 태어난 그는 가쓰라고 야구부에 입학하지만 명문 고등학교 진학에는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역경은 그의 야구에 대한 열정을 더욱 키웠습니다. 김성근은 가쓰라고 야구부에서 미약한 환경 속에서도 투지를 발휘했으며, 고교 시절부터 야구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그는 극복해야 했던 차별이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길을 걸어나갔습니다.

 

김성근의 야구 인생은 어려운 출발에서 시작되었지만, 그의 끈기와 열정으로 성취된 것입니다. 그는 교토에서 시작한 그의 야구 인생을 통해 한국과 일본 야구계에 큰 발자취를 남겼으며, 그의 희망과 열정은 후배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김성근의 야구 인생은 한국과 일본의 다양한 경험으로 시작됐습니다. 그의 학창 시절은 특히 그의 야구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고교 졸업반 시절인 1959년, 김성근은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에 합류하여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그 당시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은 오사카를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김성근은 뛰어난 활약으로 이 팀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은 최고의 선수들이 모인 팀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비주류 선수들이 주를 이뤘고, 고등학교 야구 명문고 출신들은 대부분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김성근은 뛰어난 역량으로 팀에 가세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야구 인생은 고등학교에서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1960년에 부산 동아대학교에 입학한 그는 한국에서의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고, 반년도 채 되지 않아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야구에 대한 열정은 높았으며, 동아대 시절에도 야구팀에 참여하는 등 야구에 헌신했습니다.

 

그의 대학 시절은 언어의 장벽과 적응 문제로 어려웠지만, 여러 여학생들과의 러브라인이 있었다는 사실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김성근은 야구에 집중하기 위해 그들과의 만남을 거부했습니다. 그의 야구에 대한 열정과 희생 정신은 그가 향후 야구계에서 큰 성공을 거둘 수 있도록 이끌었습니다.

김성근의 일본에서의 야구 시절은 그의 인생에서 또 다른 중요한 장면을 이끌었습니다. 동아대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돌아간 후, 그는 재일 대한야구협회 최태환의 도움을 받아 난카이 호크스 2군 캠프에서 테스트를 받았습니다. 이 경험은 그에게 많은 교훈을 안겨주었습니다. 프로 선수들과의 경쟁을 통해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절감했으며, 그들의 훈련을 관찰하고 배움으로써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난카이 호크스 2군 테스트에서 탈락한 후에도 김성근은 사회인 야구팀에서 자리를 찾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입단 테스트를 거쳐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김성근은 후에 자신의 경험을 되돌아보며 재일교포로서의 차별로 실패했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대해 두 가지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일본의 스포츠계는 대체로 실력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재일교포들 역시 성공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따라서 김성근의 주장을 거짓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인 야구 수준에서는 분명한 차별이 존재했습니다. 실력이 미흡한 재일교포 선수들은 대체로 입단에 실패했습니다.

결국 김성근은 사회인 야구팀 상호차량에 입단하여 성공을 거뒀습니다. 이는 사회인 야구의 일종으로, 비록 프로 수준은 아니지만 꾸준한 훈련과 노력으로 야구를 통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이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그가 어려움을 극복하고 힘들게 얻은 성공의 이야기입니다.

 

한국 실업야구의 발전과 함께 김성근의 이야기는 한 편의 드라마처럼 펼쳐졌습니다. 1961년 교토 상호차량 사회인 야구팀에서 시작한 그의 이야기는 한국의 실업야구팀인 교통부에 입단하면서 새로운 장을 열었습니다. 이후 1962년에는 기업은행 야구단으로 이적하여 한국 실업야구리그에서의 선수생활을 시작했습니다.

 

1964년, 실업야구 리그에서 기록을 시작한 김성근은 페넌트레이스에서 다승 공동 2위를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다승 랭킹에서 백수웅에게 밀려 2위를 차지했습니다. 또한 1963년에는 대통령배 가을 리그에서 볼넷 1개만을 내주며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는 등 그의 활약이 빛을 발했습니다. 김성근은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준우승을 이루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재일교포 선수들의 도래와 국내 선수들의 성장으로 김성근의 입지는 위태로워졌습니다. 이에 어깨 문제와 혹사 등으로 인해 그는 투수를 포기하고 타자로 전향했습니다. 하지만 어깨 문제로 인해 1968년 결국 선수생활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김성근은 현역 시절 좌완 정통파 투수로 활약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투구 폼을 돌아보며 좀 더 높은 팔각을 유지했다면 더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한 최초로 싱커를 던진 투수로 알려져 있으나, 이에 대한 복잡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 시절의 환경과 상황을 감안할 때, 자신이 최초로 싱커를 던진 것으로 생각했으나 명확한 증거가 없다는 점을 감안해야 했습니다.

 

김성근의 이야기는 한국 실업야구의 역사를 통해 볼 때 중요한 순간들을 반영합니다. 그의 노력과 열정은 한국 야구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그의 이야기는 오랜 세월 동안 기억될 것입니다.

김성근: 한국으로의 영주귀국

 

1964년 12월, 김성근은 일본에서의 비자 갱신이 더 이상 허용되지 않자 일본 거주권을 포기하고 영주귀국을 결심했습니다. 이 결정은 그에게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었으며, 홀어머니와 친척, 친구들과의 이별을 의미했습니다. 김성근은 이별의 순간을 회상하며 많이 울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국에서 야구로 인정받아 국가대표팀 감독까지 해보겠다는 강한 의지로 눈물을 달랬습니다.

 

김성근의 영주귀국은 그가 홀로 대한민국으로 돌아와 야구에 대한 열정을 이어가는 과정이었습니다. 당시 그는 자신의 야구 실력을 인정받아 한국 야구계에서 성공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이 결정에는 논란이 있었습니다. 김성근이 영주귀국을 결심한 두 달 후,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지면서 가족들과의 재회가 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김성근이 영주귀국을 결심한 1964년 12월은 한일 국교 정상화를 제1의 국정 과제로 삼은 사토 에이사쿠가 총리에 취임한 지 한 달 후였습니다. 김성근이 귀국을 결심한 지 두 달 만에 한일 국교 정상화 기본 합의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로 인해, 당시 한일 국교 정상화 논의가 이미 크게 진전되어 있었던 시점이라는 점에서 김성근의 결정이 논란의 여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김성근이 영주귀국을 결심했을 당시, 한일 국교 정상화가 실제로 이루어질지 예측하는 것은 20대 운동선수에게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당시 상황에서 운동선수가 국제 정세를 파악하는 것은 지금보다 더욱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지더라도 가족과의 재회가 바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습니다. 일본이 1964년 해외여행 자유화를 시행한 첫 해였지만, 한국은 여전히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김성근은 후일 인터뷰에서 본인의 영주귀국 직후에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진 것에 대해 "내 인생에 참 어려운 고비들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이상하게 잘 해결됐어. 참 운이 좋다고나 할까"라고 회상했습니다. 이는 그의 결심이 운 좋게도 한일 국교 정상화와 맞물려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 재일교포의 상황을 고려하면, 김성근의 가족도 북한으로 가려고 했던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재일교포의 대부분은 총련계였고 남북 간 이념 대립이 격렬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재일교포는 거의 북한 간첩에 가까운 취급을 받았고, 이로 인해 출입국 관리가 까다로웠습니다. 따라서 국교 정상화 이후에도 가족과의 만남이 쉽지 않았습니다.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은 시기였고, 간첩으로 의심받을 소지가 다분한 상황에서 일본과 한국 간 여행 허가는 매우 어려웠습니다.

 

김성근의 한국으로의 영주귀국은 그에게 있어 많은 도전과 기회를 안겨주었습니다. 그의 결심은 한국 야구계에서의 성공을 향한 첫걸음이었고, 이후 그는 한국 야구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김성근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그가 겪었던 어려움과 결심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습니다.

김성근: 지도자 은퇴 이후의 여정

 

2022년 한국시리즈 2차전, 김성근은 박재홍 해설위원과 함께 인천 SSG 랜더스필드를 찾았습니다. 원래 그는 시구를, 박재홍은 시타를 맡을 예정이었으나, 이태원 압사 사고로 인해 계획이 취소되어 대신 스카이박스에서 경기를 관람했습니다. 김성근은 집에서 보던 야구와 높은 곳에서 보는 야구의 차이점에 대해 "더그아웃에서 보는 것과 위에서 보는 것이 완전히 다르다. 위에서 보니 긴장감 없이 편하다"라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김성근은 또 김강민 선수에 대해 "많이 늙었더라. 살도 많이 쪘더라"며 웃어 보였습니다. "김강민이 한국 나이로 41세더라. 선수도 모자란데 우리나라도 그런 선수를 많이 남겨놔야 한다"라며 베테랑 선수들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지도자로서 기분 좋은 순간은 많지 않았지만, 가르쳤던 선수가 성장할 때 기분이 좋다"고 덧붙였습니다. 특히 김강민의 홈런을 보고 흐뭇함을 느꼈다고 밝혔습니다.

 

김광현에 대해서는 "2007년 당시 신인이어서 부담감이 적었지만, 어제는 이겨야 한다는 의욕이 앞서면서 서두르는 것 같았다"라며 경기를 평가했습니다.

 

2023년 11월 7일, 김성근은 JTBC의 예능 프로그램 '최강야구'의 팀 최강 몬스터즈의 2대 감독으로 선임되었습니다. 김성근은 처음에 예능 프로그램이라는 이유로 참여를 꺼렸지만, JTBC 측이 보내온 진지한 영상에 감명받아 감독직을 수락하게 되었습니다. 프로그램 총연출 장시원 PD는 후쿠오카로 날아가 직접 상황 설명을 하고 김성근을 설득했습니다.

 

김성근은 예능 출연 후 다시금 언론과 팬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암을 세 번이나 겪었으나 약점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참았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한화 이글스 감독 시절에 대한 질문에 대해 "모든 분야는 세대교체가 아니라 흐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며 현 야구 시스템에 대한 비판을 덧붙였습니다.

감독의 역할에 대해 그는 "감독은 선수들이 돈을 잘 벌게 해주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선수들이 돈을 잘 벌려면 경기에서 이겨야 한다는 그의 철학은 많은 팬들과 전문가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의 팀들은 전력 쥐어짜기를 하는 성향으로 인해 은퇴를 앞둔 선수들도 영입하며 선수단 연봉 총액 1위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최강 몬스터즈의 감독으로서 김성근은 예능감을 발휘하며 팬들에게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정근우 어디 갔어?"라는 말이나, 2022 시즌 최종전에서 패배 후 보여준 눈물 젓는 제스처 등은 팬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했습니다. 시즌 종료 후 팀 신인상을 받으며 최고령 신인왕 타이틀을 얻게 되었습니다.

 

김성근은 한 기사에서 한국 야구의 질적 저하를 독립 리그 등 아마야구와 프로야구가 구분되고 있기 때문이라며, 피라미드 체제를 역피라미드 체제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독립 리그나 실업야구 리그를 활성화시켜 프로 입단에 실패한 선수들이 기량을 발전시킬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인터뷰에서는 박용택, 정근우 같은 선수들이 세대교체라는 명분으로 쉽게 버려진다며 비판했습니다. 물론, 이는 구단의 내부 사정상 어쩔 수 없는 경우도 많지만, 김성근은 선수들이 더욱 존중받을 수 있는 환경을 원했습니다.

2023년 11월 13일, 김성근은 김응용, 김인식 감독과 함께 LG 트윈스와 kt wiz의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시구를 맡았습니다. LG 트윈스는 최종 스코어 6:2로 승리하며 29년 만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김성근의 아들인 김정준 수석코치도 13년 만에 우승반지를 추가하게 되었습니다.

 

김성근의 지도자 은퇴 이후의 여정은 여전히 활발하며, 그의 야구에 대한 열정과 철학은 계속해서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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