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는 1932년 12월 4일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신용동 용진마을(현 대구광역시 동구 용진길 172)에서 태어났다. 노태우는 공산공립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대구공립공업중학교를 거쳐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육군사관학교를 11기로 졸업하며 군인의 길을 걸었다. 노태우는 대한민국 육군에서 1955년부터 1981년까지 복무하며 대장까지 진급하였고, 제9공수특전여단장, 제9보병사단장, 수도경비사령관, 국군보안사령관 등 주요 보직을 역임했다. 또한, 6.25 전쟁과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였다.
1988년 2월 25일부터 1993년 2월 24일까지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으로 재임하였다. 노태우의 대통령 재임기간 동안 노태우는 경제 자유화, 남북 관계 개선, 서울 올림픽 개최 등 다양한 정책과 행사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노태우의 정권 말기에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책임과 비자금 조성 혐의 등으로 인해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대통령 재임 이후에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로15안길 69에 거주하며 은퇴 생활을 보냈다.
노태우는 2021년 10월 26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에서 향년 88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노태우의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동화경모공원에 위치하고 있다. 노태우는 본관이 교하 노씨이며, 아버지 노병수와 어머니 김태향 사이에서 태어났다. 노태우의 형제로는 남동생 노재우가 있고, 배우자는 김옥숙, 자녀로는 장녀 노소영과 장남 노재헌이 있다. 노태우는 불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세례명 사도 요한을 받았다.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노태우
노태우는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으로서, 군인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하며 국가의 주요 순간들을 이끌어온 인물이다. 노태우의 생애와 경력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여러 중요한 순간들과 맞물려 있다.
초기 생애 및 군사 경력
노태우는 1945년 대구공산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대구공업중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경북중학교와 경북고등학교를 거쳐 1951년 육군사관학교 11기로 입교하였다. 1955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한 노태우는, 이후 제5보병사단 소대장으로 군 경력을 시작했다. 1959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포트브래그 특수전학교와 심리전학교를 수료하며 군사 전문성을 높였다.
1960년대 중령으로 진급한 후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어 수도기계화보병사단 1연대 3대대장으로 활약했다. 이후 육군대학을 수료하고 수도경비사단 대대장을 역임하였다. 1970년 대령으로 진급하고 육군참모총장의 수석부관 장교로 임명되며 군 내에서의 입지를 넓혀갔다.
고위 군직 및 정치 경력
1974년 준장으로 진급한 노태우는 공수특전여단장을 거쳐, 1976년 박정희 정부 하의 청와대 대통령경호실 행정차장보로 임명되었다. 이후 소장으로 진급한 노태우는 대통령경호실 작전차장보를 맡았다. 1979년 박정희 정부 말기에는 제9보병사단장을 역임하였고, 최규하 정부에서는 수도경비사령관으로 활동했다.
1980년대에 중장으로 진급하고 국군보안사령관을 역임한 후, 대장으로 진급하며 예비역으로 전역한 후 정치에 입문하였다. 1981년 민주정의당에 입당하여 당무위원으로 활동을 시작했고, 초대 정무제2장관, 대통령 외교안보 담당 특보 등을 역임하며 전두환 정부 하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대통령 재임 및 이후 활동
1987년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노태우는, 같은 해 12월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1988년 2월부터 1993년 2월까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재임하였다. 재임 중에는 1988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이끌었으며,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한 여러 시도를 하였다.
1993년 대통령직에서 퇴임한 이후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며 민주자유당 명예총재로 활동했다. 1999년에는 백범기념관 건립위원회의 고문으로 활동하며 역사적 인물들의 기념사업에 참여했다.
노태우의 경력은 군사와 정치, 두 분야에서 모두 큰 발자취를 남겼다. 노태우의 생애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중요한 순간들을 함께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노태우: 대한민국 현대사의 논쟁적 인물
노태우는 박정희 정부 당시 전두환과 함께 대한민국 육군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결성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10.26 사건으로 시해되고 국무총리 최규하가 대통령 자리에 오르자, 노태우는 전두환과 함께 12.12 군사 반란을 주도했다. 이후 정국을 장악한 전두환이 집권한 뒤, 노태우는 정치인으로 전향했다.
1987년 6월 항쟁 직후, 노태우는 6.29 선언을 발표하여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였다. 이는 신헌법에 따라 국민 직선제로 치러진 최초의 대선으로, 노태우는 민주정의당 후보로 출마하여 '보통사람들의 위대한 시대'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당선되었다. 1988년 2월 25일,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며 제6공화국을 출범시켰다.
대통령으로 취임한 노태우는 5공 청산론을 수용하여 군부 출신 인사들을 대거 정리하고, 정치 활동이 금지된 재야인사들을 대거 복권시키며 언론의 자유를 확대하였다. 또한 중도통합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노태우는 세계적인 데탕트 분위기에 발맞추어 북방정책을 펼쳤으며, 남북기본합의서를 체결하고 한반도 비핵화를 선언하였다. 더불어 북한과 유엔에 동시 가입하는 등 제6공화국 모든 정부에서 추진할 대북정책의 기초를 수립하였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기도 했다.
노태우는 권위주의 시대의 끝을 알리는 대통령이었다. 노태우는 대통령 각하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사용하지 않은 대통령이며, 대통령이 국민 앞에 설 경우 처음으로 스스로를 '나'가 아닌 '저'로 표현했다.
퇴임 후, 노태우는 12.12 군사 반란 및 5.17 내란을 주도한 혐의 등으로 1995년 전두환 전 대통령과 함께 구속 기소되었다. 1997년 4월 17일, 반란모의참여죄 등으로 징역 17년을 선고받아 헌정사상 첫 번째로 구속된 대통령이 되었으나, 같은 해 12월 22일 김영삼 전 대통령에 의해 사면되었다.
2002년 전립선암 수술 이후 건강이 악화된 노태우는 연희동 자택과 병원을 오가며 칩거 생활을 했다. 희소병인 소뇌위축증을 앓고 있었으며, 기본적인 거동조차 하지 못해 휠체어를 사용했다. 2007년 6월 6.29 선언 20주년 만찬장 참석을 마지막으로 공식석상과 매스컴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2021년 숙환으로 인해 서울대학교병원에 입원한 노태우는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같은 해 10월 26일 향년 88세로 사망했다. 이로써 대한민국 제6공화국의 시작을 주름잡은 1노 3김 시대는 완전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노태우의 삶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중요한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노태우의 정치적 행보와 업적, 그리고 논란은 한국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노태우: 회의를 자주 하는 대통령
노태우는 회의를 매우 자주 하는 대통령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제5공화국 군정의 이미지를 벗고 문민 이미지를 심기 위해서 회의를 강화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정부 부처에서도 이와 같은 방침에 따라 회의가 빈번하게 열렸다. 노태우는 취임 초기, 식사 자리에서 "나는 이름부터 '큰(泰) 바보(愚)'니 여러분이 많은 의견을 내 달라"는 농담을 하며 보좌진들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기 위해 회의를 자주 주재했다.
노태우 정부 시기에 청와대 정무비서관을 지낸 윤여준 전 환경부장관의 증언에 따르면, 두 가지 의견이 팽팽히 맞설 때는 참모들끼리 회의를 통해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또한 많은 사안들을 참모나 장관들에게 위임하기도 했다. 김영삼 전 민주자유당 대표와는 최소 일주일에 한 번씩 청와대에서 회동하여 국정 현안을 논의했다.
6공화국의 특징 중 하나인 '국민과의 대화' 역시 노태우의 주도 하에 시작된 것이다. 이후 다른 대통령들도 이 방식을 도입하여 소통 능력을 평가받았다.
보통 사람 노태우
"나 이 사람 보통 사람입니다. 믿어주세요." 이 문구는 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노태우가 선거 유세에서 한 발언으로, 노태우의 선거 슬로건 "보통 사람의 위대한 시대"와 함께 널리 알려졌다. 노태우는 군부 출신이라는 이미지가 강했으나, 김영삼과 김대중에게 밀리고 있던 상황에서 이 슬로건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 노태우 본인은 이 문구가 일반 국민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해 매우 마음에 들어했다.
1980년대 초반 최고 인기 드라마 "보통 사람들"의 영향력도 이 슬로건의 성공에 일조했다. 이 드라마는 중산층의 삶을 따뜻하게 그려내며 큰 인기를 끌었고, 노태우의 선거 전략가들은 이 드라마가 주는 의미를 놓치지 않았다. 대선 이후에도 "보통 사람"이라는 표현은 자주 사용되었고, 노태우의 이미지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노태우의 선거 운동 조직인 '보통 사람들의 모임'에는 드라마의 주연 배우 황정순이 참여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성화 점화식에서도 "보통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보통 사람 세 명이 점화를 했다. 이로 인해 개그맨들이 노태우 성대모사를 할 때마다 이 표현을 많이 사용했고, 노태우 본인도 이를 허용했다. 노태우 정부는 이전의 군사 정권과 권위주의 이미지를 타파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으며, '보통 사람'이라는 슬로건은 노태우와 노태우의 정부를 상징하는 단어로 남게 되었다.
슬로건 '보통 사람들'은 당시 주완수의 풍자 만화 '보통 고릴라'로 패러디되기도 했다. 이 만화는 1980년대 말 사회의 모순을 고릴라의 모습으로 풍자한 작품으로, 노태우의 슬로건을 빗댄 가사가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어, "새 나라의 대통령은 보통 사람입니다 / 잘난 사람 없는 나라 우리나라 보통 나라"라는 개사된 노래가 있다. 또한 '보통 사람'을 프랑스어로 '알랭 드 보통'이라고 우스갯소리로 엮으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노태우의 5.18 민주화운동 발언과 그 후의 정계적 파장
노태우 전 대통령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에 대한 발언으로 국민들의 비난과 논란을 일으켰다. 1995년 10월 5일, 경북고등학교 동창회에서의 발언은 노태우의 정치 경력을 둘러싼 논란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당시 노태우는 중국의 문화혁명을 언급하며 광주 5.18 민주화운동을 하찮게 여기는 발언을 했다. 이 발언은 국민들로부터 강한 비난을 받았고, 정치적 파장을 일으켰다.
노태우는 그 후 사과를 했지만, 이 사건은 노태우의 정치적 위상을 훼손시켰다. 특히 이 발언으로 인해 국민들은 노태우의 책임감과 인식 능력에 의문을 제기했다. 노태우는 국민들로부터의 신뢰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미 상당한 정치적 손실을 입은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 발언은 단순히 개인의 실수로 치부되기보다는 노태우의 정치적 성향과 인식의 문제를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노태우는 노태우의 정치 경험과 역량에 비해 이러한 발언을 한 것으로 보면, 노태우가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인식과 그 중요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사건은 단순히 노태우 개인에 대한 비난을 넘어서, 노태우가 속한 정치계와 국민 간의 신뢰 문제를 더욱 고발했다. 노태우의 이러한 발언과 그 후의 대응은 노태우가 대통령으로서의 역할과 책임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남겼다.
이러한 사건은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순간 중 하나로 기억될 것이며, 정치인들에게는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고 책임 있는 발언과 행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상기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다. 또한 국민들에게는 그들이 선택한 정치인의 행동과 발언이 국가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신중하게 판단해야 함을 상기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