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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2대 중소벤처기업부장관 박영선. 그녀에 대해 알아보자.Araboza

인간의 사람 2024. 5. 3.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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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2대 중소벤처기업부장관인 박영선은 1960년 1월 22일에 경상남도 창녕군에서 태어났습니다. 현재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본관은 반남 박씨이며, 부모는 아버지인 박정서와 어머니인 이영숙입니다. 결혼한 배우자는 이원조이며, 슬하라는 딸과 한 명의 아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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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선은 예일초등학교, 덕성여자중학교, 수도여자고등학교, 상명여자사범대학에서 공부한 후, 경희대학교와 서강대학교에서 학사 및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종교는 천주교이며, 세례명은 에스테르입니다.

 

그녀는 KBS 아나운서로 활동한 경력을 가졌으며, 이후 MBC에서 기자로 일한 후 국회의원과 여러 기관에서 활약하였습니다. 중소벤처기업부장관으로서 문재인 정부에서 일한 경력도 있으며,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의 선진제조 및 생산(AMP) 이사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박영선은 대한민국대전환 선거대책위원회의 디지털대전환위원회 위원장으로 활약하고 있으며, 또한 서강대학교의 초빙교수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한국여성의정 공동대표로도 활동 중이며, 하버드 대학교에서는 케네디 스쿨 선임연구원과 웨더헤드 센터 Scholar로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정치인 박영선의 학창 시절은 그녀의 개성과 끈기가 발현된 곳으로 기억되어야 합니다. 1960년 1월 22일에 경상남도 창녕군에서 태어난 박영선은 교사인 부모님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6.25 전쟁 때 북한을 피해 남한으로 피난 온 경험이 있었는데, 그런 어머니를 통해 실향민과 북한에 대한 공감을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어머니의 노력으로 서울로 올라온 박영선은 사립 예일초등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그 후 덕성여자중학교, 수도여자고등학교를 거쳐 상명여자사범대학으로 진학하였습니다. 학창 시절 박영선은 방송반에 속해 활발하게 활동하며, 실제 방송국 PD들이 학교를 찾아와 도와준 덕분에 미래의 방송 활동에 기초를 다졌습니다.

 

대학 시절에는 명문대에 입학하지 못해 좌절한 경험이 있었지만, 그녀는 끈기와 열정으로 이겨냈습니다. 경희대학교에서 지리학을 전공한 그녀는 학생 운동에 참여하지 못했던 아쉬움을 가지고 있지만, 그 빚을 갚기 위해 후에 정치에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박영선은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된 후 대통령과의 동문 관계를 강조하며 정치 활동에 임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문재인 대통령의 비판적인 입장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이제는 서울시장 선거를 준비하면서 자신의 전공 분야와 능력을 살려 도시 인문 지리학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있습니다. 이처럼 박영선의 학창 시절은 그녀의 개성과 열정이 가득한 순간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1981년, 박영선은 KBS에서 아나운서로 합격하게 되어 춘천방송국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당시 군인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데, 그만큼 그녀의 매력과 전문성이 돋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서 서울에서 출퇴근을 해야 했던 어려움도 겪었습니다. 이후, 1982년 11월에는 지방 근무가 없는 MBC에 시험을 보고 아나운서로 입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입사한 후에는 보도국으로 발령을 받아 기자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1983년, 박영선은 입사한지 5개월 만에 MBC 뉴스데이트의 앵커로 임명되었습니다. 1984년 10월부터 1985년까지는 MBC의 여가를 맡아 담당하였습니다. 이후, 1985년에 외교관과 결혼 후 미국으로 떠났지만, 6개월만에 이혼하여 1987년에 귀국하였습니다.

 

그 이후에도 MBC에서 아나운서와 기자로 활약하던 그녀는 90년대 초반에는 MBC 마감뉴스의 앵커를 맡았고, 1993년부터 1995년까지는 MBC 뉴스와이드의 앵커로 활약했습니다. 그러나, MBC 아침뉴스 앵커 시절에는 김문수 의원을 인터뷰하면서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국제부로 자리를 옮겨 앵커 직을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김영삼 대통령의 '여성 인력' 강조와 함께 각 방송국에 여성 특파원을 발굴하라는 지시가 나오면서 박영선은 미국 LA 특파원으로 발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녀는 홀리우드에서 활약하며 MPAA 주최 행사와 영화사 취재를 담당하였습니다. 뉴스데스크 40주년 특집 방송에서는 유명 배우나 감독들과 대면하여 그들의 이야기를 전달하였습니다. 특파원 시절인 1997년 3월에는 미국에서 재혼하게 되었습니다.

 

1997년에 귀국한 후에는 MBC 뉴스센터 500의 진행을 맡았으며, 1998년 9월 19일부터 1999년 12월 26일까지는 MBC 뉴스데스크의 주말 앵커를 역임하였습니다. 그녀는 2000년에는 피자의 아침 - MBC 아침 뉴스의 앵커를 맡았습니다. 그리고 2000년대 초반에는 '경제매거진'의 진행을 맡으면서 MBC 보도국 경제부장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박영선은 그의 다채로운 경력을 통해 어려움을 극복하고 자신의 역량을 발휘해 왔습니다. 그녀의 행보는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2017년 대선 이후, 박영선 의원은 정치 무대에서 활약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의 이동경은 대선 경쟁에서 문재인 후보 측을 몰아세우기까지 이어졌다.

이미 그는 정치계에서 정동영 계열의 대표적 인물로 손꼽히며, 열린우리당에서부터 민주당으로 이적하더라도 비노계의 주역으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그의 정치적 관계는 변화무쌍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과의 관계도 복잡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협력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세월호 사태 이후로는 깊은 불화를 보인다. 이로 인해 친문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그의 행보를 주목하게 되었다.

 

대선 당내 경선 때에는 문재인 후보 측을 열세에 몰아세우며 '문재인 저격수'로 활약했다. 이러한 행보로 박영선은 문재인 캠프에서 떨어지게 되었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문재인 후보가 당내 경선에서 승리한 후, 박영선은 문재인 측에 합류하며 공동선대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이로써 그의 정치적 입지가 다시한번 변경되었다.

 

이후에는 서울시장 선거에 나설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으나, 박원순 시장의 3선 출마 결정으로 그 가능성은 희미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영선은 서울시장 경선에 나와 유세를 벌이며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그의 행보는 친문 지지자들 사이에서 '친문 좌장'이라는 별명으로 논란이 되었다.

또한, 손금주와 이용호의 입당을 불허하는 더불어민주당의 결정에 대해 박영선은 "순혈주의는 역사적으로 보면 개방과 포용에 늘 무릎을 꿇었다"며 비판을 했다. 이는 당 내부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원인이 되었으며, 친문과 비문 간의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다.

 

결국 박영선은 2018년 전당대회에서 불출마를 선언하며 정치 무대에서의 역할을 조용히 마쳤다. 그는 이후 국회 사법개혁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여전히 정치적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러한 박영선의 활약은 그의 정치적 존재감을 재평가하게 만들었으며, 그의 행보는 앞으로도 정치권에서 주목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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