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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미 : 80년대 유명 여가수 ; 그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시사맨 2024. 6. 10.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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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미는 대한민국의 여성 가수로, 1961년 11월 5일에 전라남도 광주시에서 태어났습니다. 현재는 대한민국 국적을 가지고 있으며, 가족으로는 배우자인 임동신과 아들 임준혁 그리고 딸 임수연이 있습니다. 주현미는 한성화교학교와 중앙대학교 약학대학을 졸업하였으며, 가톨릭 신자로 소화 데레사라는 세례명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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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로서의 주현미는 1985년에 '비내리는 영동교'로 데뷔하여 현재까지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주현미는 유튜브 채널인 주현미TV를 운영하며 22.2만명의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으며, 씨씨엔터테인먼트 소속이며, 별명으로는 "수도꼭지"라 불립니다.

 

주현미는 대한민국의 트로트 가수로서, 1980년대에는 전성기를 누렸으며 이미자를 잇는 트로트 여왕으로 평가받았습니다. 특히 2005년 기준으로 KBS 1TV의 가요무대 출연 횟수가 가장 많은 가수 중 한 명으로 손꼽힙니다.

 

주현미는 한국계 혼혈 화교 2.5세 출신으로, 부모님 모두가 한국인 출신입니다. 어머니는 전라북도 출신이며, 아버지는 중국 산둥성 모평현 출신이지만 어린 시절에 한국으로 이주하여 자랐습니다. 주현미와 형제들은 어린 시절부터 한국 문화 방식으로 자랐으며, 이는 가정 내에서 한국 문화가 지속되었기 때문입니다.

남편은 한국 록그룹 비상구(EXIT) 보컬리스트 출신이자 조용필 밴드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기타리스트였던 임동신입니다. 1988년 결혼한 두 사람은 서로를 위해 큰 희생을 하며 함께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는 당시의 사회적 관습과는 달리, 여성이 결혼 후에도 자신의 직업을 계속하고 남편을 지원하는 것이 흔치 않았던 시대에 큰 결심이었습니다.

 

2018년 인터뷰에서 주현미와 임동신 부부는 자녀들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임준혁군은 버클리 음대 출신이며, 딸 임수연양은 어머니를 따라 가수로 데뷔했다는 점을 언급했습니다.

 

또한, 주현미는 가톨릭 신자로, 세례명으로 '소화 데레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대만 가수 등려군도 가톨릭 신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외에도 주현미와 남편이 대만 바깥에 연고를 둔 외성인 집안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결혼 후에 대한민국 국적으로 귀화한 주현미는 한성화교학교를 다녀서 중국어가 유창하며, 화교 커뮤니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현재의 주현미는 화교가 아닌 화인으로 분류됩니다. 한국에서는 중국계 혈통이 있으면 전부 화교라고 보는 경향이 있지만, 중화권에서는 이를 다르게 구분합니다.

 

주현미는 약사로서의 활동과 가수로서의 활동을 거듭하며 다채로운 이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약사로서의 활동에 대해 살펴보면, 중앙대학교 약학대학을 졸업하고 약사 면허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는 어머니의 바램으로 안정적인 직업을 택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주현미의 경영한 '한울약국'은 수줍음 타는 성격과 원칙을 고수한 탓에 사업 수완이 부족하여 일찍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주현미는 화교 출신이며,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화인으로 분류됩니다. 주현미는 화교 커뮤니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의약분업 이전에는 영양제나 항생제를 달라는 손님들에게 거절하고 운동, 식이요법을 권유하여 별난 약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가수로서의 활동에 대해 살펴보면, 주현미는 1981년부터 대중가수로 활동을 시작했으며,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음반을 발매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1984년에 발매한 메들리 앨범 '쌍쌍파티'는 대히트를 기록하여 가요계를 뒤흔들었습니다. 이 앨범은 동시녹음이 아닌 따로 따로 녹음한 후 편집하여 제작되었지만, 편집이 뛰어나 손님이 없다는 이유로 당시 데뷔곡은 아니었지만 대중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었습니다. 주현미의 음반은 최고 300만장 이상이 팔린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가요계에 큰 파장을 일으킨 것으로 평가됩니다.

 

주현미는 1985년에 발표한 1집 앨범 ≪비내리는 영동교≫로 대중음악계에 데뷔했습니다. 쌍쌍파티의 성공을 토대로 주현미는 최고 가수들의 반열에 올라섰으며, 1985년에는 9개의 음반을 발표하여 7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했습니다. 주현미는 약사로서의 활동을 병행하면서도 가수로서의 명성을 높였으며, 소속사간의 잡음과 금전적인 문제에 직면하면서도 지속적인 활약을 펼쳤습니다.

 

주현미의 활약은 1985년 가요계를 뒤흔들었으며, MBC 10대 가수상과 KBS 가요대상에서 여자 신인상을 수상할 만큼의 성과를 거뒀습니다. 이에 주현미는 가수로서의 입지를 다지며 트로트계를 새롭게 이끌어 나가는 중심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동아일보는 주현미를 "85년 가요계를 뒤흔들었다"고 평가하며 주현미의 위상을 강조했습니다.

1986년에도 주현미의 인기는 안정적으로 이어졌으며, 주현미는 여러 상을 수상하며 트로트의 강세를 이어갔습니다. 이는 주현미가 음악적으로 안정적인 위치에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이후에도 주현미는 계속해서 트로트계의 중심에 서며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주현미의 인기는 해외에서도 높았으며, 주한 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한국 노래 중에도 주현미의 곡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주현미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큰 사랑을 받고 있음을 증명하는 사례였습니다.

 

1987년에는 주현미의 인생에서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후의 주현미의 활약은 주현미로서의 성공을 더욱 확고하게 세워나가는 과정이었습니다.

 

1988년, 주현미는 결혼 이후에 신사동 그 사람으로 돌아와 음악계에 성공적인 복귀를 이루었습니다. 그해에는 가요 프로그램에서 1위를 차지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며, 이는 올림픽과 국내 정세 등으로 흔들린 가요계 속에서도 주현미가 얼마나 주목받았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리스피아르조사연구소와 전국 DJ친목회의 조사에서도 여가수 선호도와 트로트곡 인기에서 1위를 차지하며 주현미의 인기가 여전히 높았습니다. 결국 연말 시상식에서는 KBS와 MBC의 가요대상과 최고 인기가수상을 모두 수상하여 1988년 가요계의 정상에 올랐습니다.

이어서 1990년까지도 MBC 연말 가요 대상을 3년 연속으로 수상하는 등 꾸준한 활약을 이어갔습니다. 주현미는 그 뒤에도 러브레터와 정말 좋았네 등의 히트곡으로 트로트 여왕의 자리를 공고히 하며 꾸준한 인기를 유지했습니다. 2000년대에는 조용히 활동하다가 2009년에는 소녀시대의 서현과 함께 활동하며 다시 한 번 주목을 받았습니다.

 

2010년대에는 데뷔 30주년을 맞아 전국투어 콘서트를 개최하고 유튜브 채널을 시작하여 전통가요를 보존하는 역할을 하며 새로운 팬층을 확보했습니다. 주현미의 활약은 미스터트롯 등의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가수 인생의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이어졌으며, 2020년에는 데뷔 35주년을 기념하는 앨범을 발매하며 여전한 힘을 보여주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전국투어와 디너쇼 등의 활발한 공연으로 데뷔 40주년에 이르러도 어마어마한 티켓파워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현미는 음악의 경지에서 변함없는 열정과 재능을 발휘하며, 주현미의 이름은 한국 음악사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

 

주현미는 음악계에 깊은 발자취를 남긴 한국의 보컬리스트 중 한 명입니다. 주현미의 대표곡들은 시대를 초월하여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으며, 주현미의 음악적 재능과 열정이 담긴 작품입니다.

1985년의 "비 내리는 영동교", 1986년 "울면서 후회하네", 1987년 "눈물의 부르스", 1988년 "신사동 그 사람", 그리고 "비에 젖은 터미널" 등은 주현미의 음악적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작품들입니다. 이들은 주현미의 맑은 음색과 트로트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스타일을 보여주며, 주현미의 창법과 스타일이 기존의 트로트에서 차별화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주현미는 단순히 음악을 부르는 가수로서의 활약뿐만 아니라 음악에 대한 이해도와 포부를 보여주었습니다. 어려운 트로트 장르에서도 주현미의 음악은 새로운 흐름을 만들었고, 주현미의 활약은 트로트의 인기를 다시 한 번 끌어올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주현미의 활약은 변화하였습니다. 새로운 가수들의 등장과 음악 산업의 변화로 인해 주현미의 인기는 조금씩 사그라들었지만, 주현미의 음악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주현미는 단순히 한 장르에만 국한되지 않고 발라드나 팝송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소화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는 주현미의 음악적 다재다능함과 탁월한 가창력을 입증하는 증거이며, 주현미의 음악은 시대를 초월하여 계속해서 사랑받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주현미는 한국 음악계의 레전드 중 한 명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주현미의 이력과 함께 떠도는 우스갯소리들은 주현미가 얼마나 다재다능하고 독특한 인물인지를 보여줍니다.

 

주현미가 처음으로 해외를 나갈 때, 가수 조용필이 농담으로 낸 "비행기를 탈 때는 꼭 약사면허증을 보여줘야 된다"라는 말을 실제로 따르는 일화가 있었다는데요. 이는 주현미가 항상 안전을 우선시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그리고 데뷔 초에는 숏컷이었지만, 후에는 팬들의 요청에 응해 머리를 길게 기르기 시작한 것도 주현미의 관대한 성격을 보여줍니다.

 

주현미의 음악뿐만 아니라 무대에서의 포인트인 눈웃음도 매력적인 요소 중 하나입니다. 또한 약사와 가수로 활동하던 시절, 하루에 약사 일과 음반 취입 활동을 병행하며 열정적으로 활동했다는 이야기도 주현미의 인내심과 열정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주현미의 인생은 어려움과 힘든 시간도 많았습니다. 특히 에이즈 루머로부터 받은 상처는 깊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현미는 그 어려움을 이겨내고, 오랜 세월 동안 음악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주현미의 다재다능함과 예술적 재능은 여전히 사랑받고 있으며, 주현미의 인생은 음악사에 길이 남을만한 풍요로운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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