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관은 대한민국에서 다양한 공직을 역임한 정치인으로, 특히 지방자치와 행정 분야에서 김두관의 업적이 돋보입니다. 1958년 경상남도에서 태어난 김두관은 경기도와 경상남도에서 거주하며 지역 사회에 큰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김두관은 경상남도 남해군수로 민선 1기와 2기를 거쳐 지역 발전에 기여하였으며, 참여정부 시절 제5대 행정자치부장관으로 임명되어 중앙과 지방 간의 협력 강화를 주도했습니다. 2010년에는 경상남도의 34번째 지사로 선출되어 무소속으로 지사직을 맡았습니다. 김두관은 경제 발전과 지역 사회의 균형 있는 발전을 추구하는 데 중점을 두었으며, 특히 지역 경제 활성화와 주민 복지 증진을 위해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김두관의 지사 시절 동안 경상남도는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기반을 다졌으며, 김두관의 리더십 아래 많은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현재 김두관은 더불어민주당에 소속되어 경기 김포시와 경남 양산시에서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김두관은 김두관의 정치 경력을 통해 지역사회 발전과 국가 발전에 기여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김두관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시골 이장에서 시작해 군수를 거쳐 행정자치부장관과 경상남도지사, 그리고 국회의원 자리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김두관의 정치 경력은 지역 사회의 작은 역할에서부터 시작해 국가적인 무대까지 확장되었습니다. 특히 참여정부의 초대 행정자치부장관을 지내며 '리틀 노무현'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주목받았습니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는 무소속 야권 단일후보로 경상남도지사 선거에 출마해 53.5%의 득표율로 당선되는 기염을 토하면서 민주당의 유력 정치인으로 기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2012년 민주통합당 제18대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하기 위해 경남지사직을 사임하는 정치적 결단과, 당시 문재인 후보와 경쟁하며 보여준 비방적 행보는 지지자들에게 큰 실망을 안기며 정치적 고난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이후 김포시로 상경해 재수 끝에 국회에 입성한 김두관은 당의 요청에 따라 다시 양산시로 내려와 재선에 성공하며 중앙 정치에서도 자신의 뜻을 펼치고 있습니다. 김두관의 정치 여정은 꾸준한 노력과 도전의 연속이며, 김두관의 경험은 앞으로의 정치 행보에 있어 중요한 자산이 될 것입니다.
김두관: 입지전적인 정치인의 발자취
김두관은 대한민국 정치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온 인물로, 김두관의 경력은 지방에서 중앙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여정의 본보기라 할 수 있습니다. 1987년 남해농민회 사무국장으로 첫 발을 내디딘 김두관은 이듬해 남해군 고현면 이어리 마을 이장을 맡아 지역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김두관의 정치적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1988년 민중의당 남해군·하동군 지구당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습니다. 1989년에는 남해신문의 대표이사 사장 겸 발행인으로 언론계에서도 활동했습니다.
김두관의 정치적 도약은 1995년 제38대 경상남도 남해군수로 선출되면서 본격화되었습니다. 이후 1998년 재선에 성공해 제39대 남해군수를 역임하며 지역 행정의 중요성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2003년 참여정부의 제5대 행정자치부장관으로 임명되었고, 지방 분권과 행정 혁신을 주도하며 '리틀 노무현'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김두관의 행정 능력은 이후에도 계속 발휘되어 2010년 제34대 경상남도지사로 선출되며, 무소속 야권 단일후보로서 53.5%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김두관의 정치 여정은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2012년 민주통합당 제18대 대통령 선거 경선에 출마했으나, 문재인 후보와의 경쟁에서 비방 논란을 겪으며 정치적 고난기를 맞았습니다. 그러나 김두관은 이에 굴하지 않고 2014년 김포시로 정치적 무대를 옮겨 국회의원으로서 재기에 성공했습니다. 이후 더불어민주당의 요청에 따라 양산시로 이동해 제21대 국회의원에 재선되었으며, 현재 더불어민주당 경상남도당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중앙 정치에서도 김두관의 영향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김두관의 끊임없는 도전과 노력은 그를 대한민국 정치사의 중요한 인물로 자리매김하게 했습니다.
김두관: 이장에서 군수로
김두관은 1958년 12월 3일 경상남도 남해군 고현면 이어리에서 태어났다. 김두관의 저서 『아래에서부터』(비타베아타, 2012)에서 김두관은 실제 출생일은 음력 1958년 10월 23일이며, 할아버지가 출생신고를 늦게 하는 바람에 주민등록상으로는 1959년 4월 10일로 되어 있다고 밝히고 있다. 유시민의 『나의 한국현대사 1959-2020』(돌베개, 2010)에서는 유시민이 김두관을 호적상 동갑이지만 실제로는 한 살 많은 형님으로 대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김두관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를 여의고, 해외로 돈벌이를 나간 형들을 대신해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하며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김두관은 남해 도마국민학교, 남해중학교를 졸업하고 남해종합고등학교(현 남해제일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국민대학교 어문계열에 합격했으나 경제적 어려움으로 진학을 포기하고, 고향에서 마늘 농사를 지었다. 이후 대학 진학을 결심해 1979년 영주경상전문대학 행정과에 입학했고, 1981년 동아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정치외교학과로 편입했다. 1982년 군에 입대하여 30개월간 복무한 뒤 1985년 병장으로 전역했다.
복학 후 김두관은 민주화운동에 투신해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에 가입했고, 사회부장으로 활동하다가 개헌추진본부 충청북도지부 결성대회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되어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수감 중 고향으로 돌아가 농민운동을 하겠다고 결심한 김두관은 출소 후 고향으로 돌아가 남해농민회를 결성하고 사무국장에 취임했다. 1988년 창당된 진보 정당 민중의당에 입당해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김두관은 고향 이어리의 이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지역사회에서 신망을 쌓기 시작했다. 1989년에는 지역 신문사인 남해신문을 설립해 대표이사로서 운영하며 지역 주민들과의 소통을 강화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경상남도 남해군수에 출마해 민주자유당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당시 김두관은 전국 최연소 지방자치단체장으로 기록되었으며, 이는 지금까지도 선거로 선출된 최연소 지방자치단체장 기록으로 남아 있다. 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무소속으로 출마해 재선에 성공하며 김두관의 정치적 입지를 확고히 했다.
김두관의 남해군수 시절은 영화 '이장과 군수'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민선 2기 남해군수 임기 말인 2002년, 김두관은 경상남도지사 선거에 출마하기로 결정하고 새천년민주당에 입당했다. 그러나 지역주의를 극복하는 데 대한 우려와 한나라당 김혁규 후보의 강력한 지지로 17%의 득표율에 그치며 낙선했다. 이는 김두관에게 큰 정치적 도전이었으나, 이후에도 김두관은 지역과 중앙을 오가며 꾸준히 정치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김두관: 행정자치부장관
김두관은 2003년 2월 27일 참여정부의 초대 행정자치부장관으로 취임하며, 만 45세로 민주화 이후 최연소 장관이 되었다. 문재인의 저서 '문재인의 운명'에 따르면 김두관은 장관직 수행 평가에서 여러 차례 1위를 차지할 만큼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은 김두관의 업무 수행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특히 한총련의 미군기지 침투 사건을 이유로 국회에서 해임건의안을 제출하여, 해임건의안이 결국 통과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해임건의안을 거부하고 김두관을 지키려 했으나, 계속된 논란 끝에 김두관은 스스로 사의를 표명했고, 2003년 9월 18일 장관직에서 퇴임하게 되었다. 이는 국회 해임건의안 통과 시 사임하는 관례를 따른 것이다.
해임건의안 가결은 김두관에게 정치적 타격을 주었으나, 민주당계에서는 오히려 김두관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한나라당 원내총무 홍사덕은 기자간담회에서 해임건의안이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음을 시인했다. 한나라당의 이 같은 행보는 김두관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정치적 공격으로 인식되었다. 불명예스럽게 퇴임했지만, 민주당계에서는 이를 한나라당의 정치적 공격으로 받아들이며 김두관에 대한 지지를 높였다. 이후 열린우리당이 창당되자 김두관은 바로 합류했다.
김두관은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공천을 받아 남해군-하동군 지역구에 출마했다. 당시 열린우리당은 탄핵 논란으로 인해 유리한 입장에 있었고, 김두관의 당선 가능성도 높게 평가되었다. 그러나 선거운동 중 정동영 의장의 노인 폄하 발언이 보도되면서 보수층이 결집했고, 결국 김두관은 한나라당 박희태 후보에게 약 7,000표 차이로 석패했다.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열린우리당 후보로 경상남도지사 선거에 출마했으나, 한나라당 김태호 후보에게 압도적으로 패배했다.
김두관은 이후에도 정치적 도전을 이어갔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무소속으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했으나, 한나라당 여상규 후보에게 밀려 40%의 득표율로 낙선했다. 이렇게 2년 주기로 4번의 선거에서 연속으로 2위를 기록하며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이러한 정치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김두관은 중국 베이징대학에서 역사학과 고급연수생으로 연수를 다니며 학문적 성장을 도모했다.
김두관 : 3수 끝의 경상남도지사 당선
한국 정치사에 있어서는 드물게도 지방 선거에서 3번의 도전 끝에 당선된 김두관 경상남도지사는 그 자신만의 역사를 썼다. 김두관의 정치 경력은 단순한 지역적 지배력을 넘어서, 국내 정치의 중요한 터전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김두관은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당,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의 단일 후보로 선출되었으며, 야권 단일화의 중심에 서서 한나라당 후보를 물리쳤다. 이러한 성과는 김두관이 지역 사회와 밀착된 정치 스타일을 채택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지역주의를 넘어선 김두관의 성공은 중앙에서의 활동 경험과 함께 지역밀착형 후보로서의 강점을 발휘한 결과로 분석된다.
김두관의 정치 경력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인상적이지만, 김두관은 단순히 경남지사의 자리에 만족하지 않았다. 2012년에는 새누리당 허남식 부산시장과의 교환근무를 통해 다른 지역에서도 김두관의 정치적인 능력을 발휘하려고 했다. 김두관은 4대강 사업 반대와 무상급식을 통과시키며 정부와의 대립을 감수하며 김두관의 원칙을 실현했다. 하지만,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하며 김두관의 정치 생활에는 새로운 도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두관은 정치적인 길목에서 자신의 진로를 고민했고, 결국 2012년 대통령 후보 경선을 향해 나아갔다. 이 결정은 김두관이 중도에서 좌로로 이동하며 정당을 떠나야 할 수도 있음을 나타냈다. 김두관의 결정은 김두관의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논쟁거리가 되었다.
김두관 : 21대 총선에서 PK에서의 신승
김두관 의원은 21대 총선에서 다시 PK(부산·울산·경남)로 차출되었다. 민주당 지도부는 PK 지역에서의 지지율 저하를 극복하기 위해 김두관을 전략적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김두관 의원은 처음에는 김포 시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며 이를 고사했으나, 지도부와 친문 그룹의 지속적인 설득 끝에 양산시 을 출마를 결심했다.
2020년 1월 23일, 양산시 을에 출마를 공식적으로 선언했고, 2월 17일에 민주당의 전략공천이 확정되었다. 이후 민주당 선거대책위원회는 그를 부산·울산·경남 지역 선거를 지휘할 공동선거대책위원장으로 임명했다. 김두관의 출마에 앞서 양산시 을에 민주당 예비후보로 등록했던 임재춘, 박대조 예비후보가 김두관 의원을 지지하며 김두관의 선거 캠페인에 힘을 실어주었다.
김두관 의원의 주요 경쟁 상대였던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는 PK 수비대장을 자처하며 양산 을에 출마하려 했으나, 미래통합당 공천에서 컷오프 당해 대구 수성구 을에 무소속으로 출마하면서 김두관 의원의 상대는 나동연 전 양산시장이 되었다. 이는 김두관 의원에게 상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을 제공했다. 나동연 후보는 웅상지역에서 민심 이반을 겪은 인물로, 김두관 의원은 웅상지역에서 근소한 차이로 승리하고 양주동에서 적은 표차로 이기면서 당선될 수 있었다.
홍준표 전 대표와의 대결이 성사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김두관 의원은 치열한 접전 끝에 경남 양산시 을에서 미래통합당 나동연 후보를 꺾고 재선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는 김두관의 정치 경력 최초로 민주당 당적을 가지고 경남에서 당선된 것이다. 김두관 의원은 민주당 선거를 지휘했던 PK 지역에서 민주당 의석이 10석에서 7석으로 줄어들었지만, 낙동강 벨트를 접전 끝에 수성하며 선방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총선 직후 오거돈 부산시장이 성추문으로 사퇴하면서 민주당 내에서 보궐선거 후보 공천 여부를 두고 격론이 벌어졌을 때, 김두관 의원은 후보를 공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두관은 "선거로 심판받는 것이 민주주의"라며, 잘못했으면 잘못한 대로, 잘했으면 잘한 대로 심판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두관 의원은 재선 이후에도 다양한 논란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내놓았다. 이용수 할머니의 폭로로 촉발된 윤미향 당선인 및 정의연에 대한 의혹 공세,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 사면 논란, 부산시장 재보궐선거 무공천 여부, 북한에 대한 전단살포, 윤석열 검찰총장의 거취 등 여러 사안에서 김두관은 단호한 입장을 표명했다. 특히 윤미향 당선인 관련 의혹 제기에 대해서는 "친일, 반인권, 반평화 세력이 최후의 공세를 하고 있다"고 강력히 반발하며 윤미향 당선인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2021년 초, 김두관 의원이 대선 후보로 떠오른다는 소문이 돌았다. 김두관 의원은 4월 26일, 아시아경제와의 인터뷰에서 대선 출마를 공식화했다. 김두관은 국회의원직을 유지한 채 출마할 의사를 밝혔고, 6월 12일 출판기념회를 열며 문재인 대통령을 '큰형님'이라고 호칭하며 친문 세력과의 결속을 강화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2021년 9월 26일, 김두관 의원은 이재명 후보를 지지하며 경선에서 하차했다. 이는 김두관의 정치적 생명을 이어가는 중요한 결정으로, 앞으로의 행보가 주목된다.
김두관 : 제20대 대통령 선거 이후
2022년
김두관 의원은 제20대 대통령 선거 이후 이재명 후보의 캠프에 합류한 이외에는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주로 지역 현안에 집중하며 국회의원 3선 도전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였다.
대선 패배 후, 김두관 의원은 3월 11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재명 후보를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임명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문재인 정부와 이재명 후보를 지지하지 않았던 민주당 권리당원들을 비난했다. 그러나, 윤호중 비대위가 출범하자 김두관 의원은 시사 프로그램에 출연해 공개적으로 이를 비판하며, 이재명 비대위 구성을 위한 서명 운동을 진행하겠다고 선언했다. 당내에서는 이재명 조기 등판론에 부정적인 의견이 많았으며, 일부 의원들은 김두관 의원의 주장을 지나치다고 비판했다.
3월 19일, 김두관 의원은 이재명 전 후보를 1971년 신민당 김대중 후보에 비유하며 조기 등판을 촉구하고, 윤호중 비대위원장을 강하게 비난했다. 7월 27일에는 경남도당 위원장에 출마해, 8월 13일 당선되었다.
2023년
2023년 3월 22일, 김두관 의원은 차기 원내대표 경선에 출마하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보통 거대 정당의 원내대표는 3-4선 의원들이 출마하기에 재선 의원인 김두관 의원의 출마는 이례적이었다. 그러나 행자부 장관과 경남도지사를 역임한 김두관의 정치적 중량감을 고려하면 예외적인 경우라 볼 수 있다.
여론조사에서 김두관 의원은 차기 민주당 원내대표 적합도에서 20% 안팎으로 1위를 기록했다. 김두관은 (범)친명계로 분류되는 유일한 후보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4월 17일, 원내대표 경선 출마를 선언했으나 4월 28일 경선 결과 낙선했다. 여론조사에서 높은 지지를 받았지만, 의원들끼리의 선거에서는 이재명계에 대한 견제심리와 돈봉투 사건의 여파 등 여러 요인으로 낙선했다.
그러나 지역 정치권에서는 이번 낙선이 김두관 의원에게 큰 손해가 아니라는 평가가 우세했다. 대중적인 인지도를 확보하고, 지역의 지지 기반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도지사 중도 사퇴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도 어느 정도 희석될 것으로 보인다.
5월경, 김두관 의원은 지역구의 숙원사업인 부산-양산-울산 광역전철의 예비타당성 조사를 확정시켰다. 국토부의 관심을 받는 이 사업은 상당한 사업동력을 확보할 것으로 보이며, 이로 인해 지역 내 인지도도 다소 상승했다.
제22대 총선 낙선, 다시 야인으로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두관 의원은 양산시 을에 공천을 받아 3선을 노렸다. 그러나 국민의힘에서 재선 경상남도지사 출신인 김태호 의원을 전략공천하면서 전직 경남도지사 간의 맞대결이 이루어졌다. 김두관 의원은 여론조사에서 오차범위 안팎으로 김태호 후보를 앞서가고 있었고, 출구조사에서도 앞서는 것으로 나왔으나, 실제 개표 결과 김태호 후보에게 2.11%p, 2,085표 차로 밀려 낙선했다.
낙선의 주요 원인으로는 웅상지역의 이슈에 대한 미흡한 대응과 낮은 지역구 활동 등이 꼽힌다. 또한, 같은 총선에서 양승조, 이광재, 홍익표처럼 험지에 자진해서 출마한 것도 아니고, 현역 지역구에서 패한 것이 정치적 타격으로 작용했다.
김두관 의원은 향후 경상남도지사 재출마나 수도권 및 경상남도의 국회의원 재보궐선거 출마를 통해 정치적 재기를 모색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과거 도지사직을 사퇴한 경력이 있어 쉽지 않은 도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