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은 대한민국의 제17대 대통령으로, 2008년부터 2013년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1941년 12월 19일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이명박은 경상북도 영일군 출신으로, 경주 이씨 집안의 후손이다. 어린 시절 그는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도 꾸준히 공부하며 성장했으며, 포항영흥국민학교와 포항중학교를 거쳐 동지상업고등학교에서 야간반을 수료한 후, 고려대학교 상과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그는 대학 시절부터 기업 활동에 관심을 가졌으며, 이후 현대건설에서 사업가로서의 길을 걸었다.
이명박은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 서울특별시 강남구 지역구에서 당선되며 정치에 입문했다. 이후 2002년 제3회 서울특별시장 선거에서 당선되었고, 그의 서울시장 재임 기간 동안 강남 개발과 교통 혁신, 청계천 복원 등의 주요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냈다. 그의 이러한 성과는 "청계"라는 별칭을 얻게 하였으며, 이는 그가 추진한 청계천 복원 사업에서 유래하였다. 이명박은 경제와 사회의 변화를 추구하며, 대통령 선거에 나섰고,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그의 정책은 기업 친화적인 경제 성장과 강력한 대북 정책을 중점으로 진행되었다.
대통령 재임 동안 이명박은 경제 성장과 글로벌화에 중점을 둔 정책을 펼쳤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비롯해 대규모 인프라 프로젝트들을 추진했다. 그러나 그의 재임 기간 중 발생한 대운하 계획과 부패 논란, 그리고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등은 정치적 논란을 일으켰다. 이명박은 퇴임 후에도 다양한 사회적 논란에 휘말리며, 이후 법적 문제로 인해 재판을 받기도 했다. 그의 정치적 경로와 업적은 여러 가지 논쟁을 낳았지만,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과 국제적 위상 강화에 대한 그의 영향은 여전히 중요한 부분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명박: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이명박은 1941년 12월 19일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후, 대한민국의 정치와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는 제17대 대통령직을 맡기 전부터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었으며, 특히 기업인으로서 그가 이루어낸 성공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정치 경로는 여러 논란과 평가가 엇갈리는 복잡한 이력을 지닌다. 이명박은 대한민국 정치 역사에서 유일한 기업 CEO 출신 대통령이며, 서울특별시장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통령직에 올라 많은 정책적 변화를 이끌었다. 그의 리더십 스타일은 강력하고, 때로는 독단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명박은 오사카에서 태어난 후, 경상북도 포항에서 성장하였다. 포항영흥국민학교와 포항중학교를 졸업한 후, 동지상업고등학교 야간반에 다니며 학업을 이어갔다. 이후 고려대학교 경영학과에 진학하였고, 1964년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 직무대행으로 활동하면서 박정희 정부의 한일수교에 반대하는 6.3 항쟁을 이끌었다. 이로 인해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6개월간 서울교도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이 사건은 그의 정치적 성향과 리더십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1965년 고려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현대건설에 입사하여 기업 활동을 시작했다. 이명박은 그곳에서 12년 만에 대표이사 사장까지 오르며 기업인으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특히,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총괄하며 대형 건설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그의 기업인으로서의 역량을 널리 인정받았다.
이명박의 정치 경력은 1992년에 시작되었다. 당시 그는 김영삼 대통령의 지지를 받아 민주자유당 소속으로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고, 정치적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후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소속으로 서울 종로구에서 당선되며, 정치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큰 인기를 끌었다. 2002년에는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소속으로 서울특별시장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서울시장을 재임하며 하이서울 브랜딩, 청계천 복원사업, 대중교통 시스템 개편 등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 그의 시장 재임 기간 동안 서울은 급격히 발전했으며, 이러한 성공은 그가 대통령직에 나가게 되는 기반이 되었다.
2007년, 이명박은 제1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당시 그는 한나라당 후보로 정동영 후보와의 치열한 경쟁 끝에 당선되었으며, 이는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 평화적 정권교체로 평가받았다. 이명박은 ‘경제 대통령’을 자처하며 경제 성장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웠다. 그의 주요 정책 중 하나는 ‘747 공약’, 즉 7% 성장, 4만 달러 국민소득, 7대 강국 도약이었다. 이러한 비전은 많은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었지만, 동시에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지나친 경쟁과 희생이 필요하다는 비판도 받았다. 또한, 이명박 정부는 국가 인프라 확대, 대기업 지원 등을 강화하면서 그가 기업인 출신이라는 점에서 경제 분야에서의 추진력은 강력하게 나타났다.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 이후 경제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을 주요 정책으로 삼았다. 그는 국내외에서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녹색 성장’을 내세우며 친환경 산업 육성에도 힘썼다. 하지만 그의 정책은 때때로 지나치게 상향식으로 추진되었고, 환경 보호와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노력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특히, 글로벌 금융위기와 내수 침체 상황에서 경제 회복이 더디게 진행되면서 국민들의 불만이 커졌다. 또한, 그의 정부는 복지나 교육 정책에 상대적으로 소홀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명박은 재임 기간 동안 독도 방문을 추진하며, 일본과의 역사 문제에서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그는 한일 관계에서의 주도권을 잡고, 외교적 리더십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2011년 리수핑 사건과 같은 외교적인 논란에도 시달렸고, 일부 외교 정책은 실패로 평가되기도 했다. 또한, 정부의 정보 공개와 언론 자유에 대한 압박 논란이 일면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적 가치에 대한 우려도 커졌다.
그의 임기 후반에는 정치적 논란이 많았다. 그는 대통령 퇴임 후, 그의 가족과 주변 인물들이 연루된 여러 가지 비리 사건에 휘말리면서 법적인 문제에 직면했다. 이명박은 2018년, 1심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구속되었으며, 그가 대통령직을 수행하던 시절의 여러 정책과 결정이 재조명되었다. 이 사건은 한국 사회에서 정치와 경제의 관계, 그리고 전직 대통령들의 책임에 대한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이명박의 대통령 임기와 그의 리더십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로 평가된다. 경제 성장과 글로벌 경쟁력 강화라는 목표를 추구했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한 사회적 갈등과 정치적 논란은 여전히 현재까지도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명박은 기업인 출신 대통령으로서 경제 성장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지만, 정치적,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는 데에는 한계를 보였고, 그의 정치적 유산은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