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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민 : 대한민국 제17-20대 국회의원. 그에 대해 알아보자

시사맨 2024. 5. 25.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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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민은 경상북도 영주군 이산면 출신으로, 유수호 아버지와 강옥성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형은 유승정이고, 누나는 유진희입니다. 유승민의 배우자는 오선혜이며, 자녀로는 유훈동과 유담이 있습니다. 학력으로는 대구삼덕국민학교, 대륜중학교,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와 위스콘신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했습니다. 군 복무를 육군 제33경비단에서 병장으로 제대하였고, 신체적으로는 173cm, 69kg, 혈액형은 A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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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경력 측면에서는 국민의힘 소속으로 4대의 의원 선수를 기록했으며, 17대부터 20대까지 의원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동안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원, 공정거래위원회 자문관, 여의도연구소 소장 등의 직책을 역임했습니다. 또한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과 대구 동구를 대표로 하는 한나라당, 새누리당, 그리고 무소속 등 다양한 당에서 활약했습니다.

 

바른정당과 바른미래당에서도 대표로 활동하며, 국회의원으로서 기획재정위원회 위원, 정보위원회 위원, 그리고 국방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습니다. 또한 국민의힘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 경선후보로 출마한 경력도 가지고 있습니다. 유승민은 '劉'라는 약칭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유승민은 대한민국의 경제학자 출신으로서, 유승민의 정치 경력은 유승민의 학문적 경험과 더불어 유승민이 꾸준히 쌓아온 정책 참여로 특징 지어집니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으로 일하면서도, 유승민은 1998년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최장집 교수의 제안을 받아 정책기획위원회에 참여했습니다. 특히 1997년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계획안을 제안하는 등 외환위기 당시의 중요한 정책에 관여했습니다. 또한 포스코의 경영진단반에 참여하여 포스코의 민영화를 주장하는 보고서를 제출하고, 그 결과로 2000년에 포스코의 민영화가 실현되었습니다.

 

그러나 1999년 최장집 교수의 사퇴 이후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었지만, 2000년에 이회창 전 총재의 제안을 받고 한나라당에 입당하여 정계에 복귀하였습니다. 이후 대구 동구에서 4선 국회의원으로 활약하며 새누리당의 원내대표를 맡았습니다. 그러나 박근혜 전 대통령과의 갈등으로 인해 원내대표직을 사퇴한 적도 있었습니다.

 

바른정당, 바른미래당을 거쳐 미래통합당까지 당 내외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치며 정치적 이동을 거듭했습니다. 유승민은 20대 대선 경선에 출마했으나 윤석열과 홍준표에 밀려 3위에 그쳤으며, 이후 경기도지사 선거에서도 김은혜에게 패배하였습니다. 그러나 유승민의 출마 선언은 김동연, 안민석 등과 함께 대중의 큰 관심을 끌었습니다.

유승민의 약력은 유승민의 지속적인 업적과 활약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1970년에 대구삼덕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1973년에 대륜중학교를 마치고 1976년에는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이어서 1981년 4월에는 육군 수도방위사령부 제33경비단에서 병장으로 복무한 후 만기전역했습니다.

 

대학교에서의 교육을 받기 위해 1982년에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이후 국내외에서 경제학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유승민은 1982년 1월부터 한국개발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며 원장 공로상까지 받았습니다. 또한 1984년 9월에는 미국의 위스콘신 대학교에서 경제학과 조교로 활약하며 교육 경력을 쌓았습니다.

 

유승민의 학문적인 업적은 1986년 위스콘신 대학교 Distinguished Teaching Assistant Award 및 1987년 Dissertation Travel Fellowship과 같은 상을 수상하며 인정받았습니다. 이후에는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 선임연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국무총리와 경제기획원에서도 표창을 받았습니다.

 

정치에 뛰어들며 유승민의 약력은 한나라당과 바른정당을 거쳐 국회의원으로 성장해 나가는 과정에 있었습니다. 유승민의 꾸준한 노력과 업적은 국민의 관심과 존경을 받을 만합니다.

유승민 박사의 정계 입문은 유승민의 강렬한 비판과 뛰어난 전문성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유승민 박사는 김대중 대통령의 빅딜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정계 입문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유승민은 당시의 정부 정책이 IMF와 같은 외부 기관의 지시를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특히 '빅딜'과 같은 정부의 직접적인 기업 개입이 한국의 산업 기반을 훼손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빅딜이 시장 원리를 위배하고 투자자의 신뢰를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통상 마찰을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이러한 비판은 김대중 정부의 외환위기 극복을 위한 종합보고서 작성에 이어져, 유승민이 IMF 위기 극복에 대한 핵심 보고서를 작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보고서는 김대중 정부의 경제 정책의 기본 틀이 되어 외환 위기 극복에 기여하였으며, 이러한 노력으로 유승민은 꾸준한 성취를 이루었습니다.

 

유승민의 경제학적 전문성과 단호한 입장은 공정거래위원회 자문관으로의 임명을 이끌었으며, 후에 김대중 정부의 자문 정책기획위원으로 활약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유승민은 IMF 위기를 정확히 예측하고 대비하며, 한국의 경제 안정에 기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1998년 유승민은 빌 클린턴 대통령의 방한 당시, 균형잡힌 재벌혁신과 금융혁신, 정부의 구조조정이 외환위기 극복의 핵심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는 현재의 유승민의 주장과 매우 유사합니다. 유승민은 미 대통령의 원탁회의 멤버로 초청되어 비공개 회담을 가졌는데, 그 자리에서 국제금융기구와 미국 정부의 재벌 관련 정책에 대한 견해를 밝혔습니다.

 

유승민의 주장에 대해 빌 클린턴 대통령은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이며 원칙적인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이후 클린턴 대통령은 유승민의 발언을 좋아한다는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었지만, 국민의 정부 측에서는 이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로 인해 유승민은 문제의 중심에 섰고, 유승민의 주장은 논란을 빚었습니다.

이후 유승민은 본봉 반토막의 징계를 받았고, 유승민의 외부활동이 제한되었습니다. 그러나 유승민은 굽히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의 주장을 펼쳤습니다. 이러한 결단력과 논리적인 주장은 그를 특별한 존재로 만들었으며, 유승민의 인정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이진순 교수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진순 교수는 유승민이 논리와 소신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것에 대해 칭찬하며, 유승민의 결단력을 인정했습니다.

 

유승민은 이후에도 국내에서 산업조직론 전문가로 활약하며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고 제안하는 데 헌신했습니다. 유승민은 대규모 국책사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 성과를 내고, 현재까지도 국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유승민의 끊임없는 노력과 결단력은 한국의 경제 발전과 안정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1999년, 쌍용자동차의 위기와 대우그룹의 붕괴가 한국 경제를 뒤흔들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유승민은 대우그룹 위기를 완화하기 위해 과감한 워크아웃과 정부의 재정투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유승민의 주장은 얼마 후 실현되었으나, 대우그룹은 순식간에 해체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우연히 만난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는 유승민의 경제자문을 받고 싶어했습니다. 유승민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정계에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KDI를 사퇴한 유승민은 여의도연구소 소장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유승민은 이를 통해 정치적 능력을 키우며 경제, 환경, 여성, 노동, 교육, 복지, 통일, 외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정책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특히 교섭단체 대표연설 경제분야 작성을 맡아 과거의 실패뿐만 아니라 대안을 제시하는 등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활약은 그를 지적인 면에서 훌륭한 모범적 학자로 평가받게 했습니다. 유승민은 보수주의자들 사이에서도, 그리고 진보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세련된 자유주의자'로 평가되었습니다. 유승민은 자신을 '실용주의자에 가깝다'고 평가했습니다.

 

이렇듯 유승민은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학자로서의 역량과 지적 호기심으로 정치에 발을 들였으며, 유승민의 행보는 한국 정치의 새로운 흐름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회창 후보의 작전참모로 활약한 유승민은 유승민의 최측근으로서 이회창 후보의 정책 개발과 연설을 맡아왔습니다. 유승민은 이회창 후보의 믿음직한 조언자로 자리매김했으며, 후보의 경제 개인교습까지 맡아 책임지는 등 후보의 신뢰를 얻었습니다.

 

이 회창 후보의 최측근으로서, 유승민은 엄청난 양의 자료를 꼼꼼히 읽고 소화하며 사회 전반에 걸친 다양한 이슈를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유승민은 조직을 우선으로 생각하며 신중하고 입이 무겁고, 이회창 후보에 대한 충성심이 돋보였습니다. 또한 이회창 후보의 연설문도 담당했는데, 이는 후보의 훌륭한 연설을 구사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활약으로 유승민은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인 김만제로부터 '최고의 브레인'이라는 찬사를 받을 정도였습니다. 유승민의 신임은 몇몇 현직 의원들까지 질투를 자아냈다는 소문까지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회창 후보는 노무현 후보에게 패배하고, 한나라당은 정치자금법 위반 문제로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됩니다. 그 후 유승민은 한나라당을 떠나 한림대학교에서 잠시 연구 교수를 맡게 되었습니다. 이후 유승민은 강연을 통해 정치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가며 유승민의 인물적인 면모를 발휘했습니다.

 

유승민은 국회에서 비례대표로 첫 등판을 하자마자 경제통 에이스 초선 의원으로서 주목받았습니다. 유승민의 뛰어난 경제학 지식과 분석력은 국회 교육문화위원회의 현역의원으로서 국정감사 자문을 받으러 올 정도였습니다. 또한 국가보훈처, 국민권익위원회, 국무총리실 등 각기 다른 성격의 기관들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내세우며, 특히 구조조정과 공정거래정책을 바탕으로 한 유승민의 활약은 한나라당 대표 경제통으로서 금융위원회와 공정거래위원회에서 팩트폭격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정무위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카드대란 사태나 국정교과서 검정위원 공개 논란 등 정무위원회 이외의 이슈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약방의 감초같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유승민은 열린우리당과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강력한 비판으로 불리기에 이르렀으며, 토론회에서도 유승민의 명성은 여론의 관심을 모으는 데 충분했습니다.

심지어는 금융에 무지한 기관에 대한 비판도 담당하여, 윤증현 당시 금감원장에게 돌직구를 날리기도 했습니다. 유승민의 강연은 항상 주목받았으며, 유승민의 경제학적 지식은 여러 기관에서 인정받았습니다. 더불어 정무위에서 담당한 공정위와 금융감독위는 전문적 지식이 필요한 분야여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유승민은 뛰어난 성과를 거두며 최고의 난적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유승민의 활약은 국민연금의 주식투자 활성화와 관련된 정책을 놓고 여당과 야당 간의 대립에서도 두드러졌습니다. 유승민의 신조어는 정부와 여당을 공격하는 데 큰 파괴력을 지닌 것으로 여겨졌으며, 토론회에서도 유승민의 강력한 주장은 상당한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렇듯 유승민은 정치 무대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확고히 내세우며, 다양한 이슈에 대한 명확한 견해를 제시하는 모습으로 한나라당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유승민의 정치적 야망과 뛰어난 능력은 유승민이 여러 차례 도전했던 험난한 정치적 여정을 견뎌내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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