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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현 : 대한민국 제19대 후반기 국회부의장. 그에 대해 알아보자

인간의 사람 2024. 10. 10.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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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현(李錫玄, Lee Seok-hyun)은 1951년 3월 16일 전라북도 익산군에서 태어난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현재 새로운미래 고문과 강북공익감시시민연대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제19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과 대한민국 제19대 후반기 국회부의장을 역임한 경력이 있다. 이석현의 사저는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평촌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본관은 전주 이씨이다. 이석현은 이리북일국민학교, 이리동중학교, 남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서 법학 학사, 고려대학교 정책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 한국항공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 박사를 취득했다. 이석현은 육군에서 상병으로 만기 전역하였으며, 현재는 천주교 신자이다. 정치 경력으로는 민주화추진협의회 창설기획위원, 김대중 선생 비서, 평화민주당 부대변인 등을 거쳐 여러 차례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어 다양한 위원회를 이끌었다. 이석현은 6회의 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하여 14대부터 20대까지의 국회의원으로 재직하였다. 제19대 국회에서는 전반기 남북관계 및 교류협력발전특별위원회 위원장, 후반기 국회부의장으로 활동하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민주당 정치개혁특별위원장, 더불어민주당 한반도경제통일특별위원장,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 등 다양한 직책을 맡으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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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석현: 대한민국 제19대 후반기 국회부의장

 

이석현은 대한민국의 제19대 후반기 국회부의장으로, 정치인으로서 6선의 국회의원 경력을 보유하고 있다. 이석현은 제14대, 15대, 17대, 18대, 19대, 20대 국회의원으로 재직하며, 다양한 사회적 이슈에 대해 목소리를 내왔다.

 

 생애

 

이석현은 전라북도 익산에서 태어나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한 후, 남성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석현의 가정은 특별히 여유롭지 않았지만, 농부인 아버지의 기대와 동네 사람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안정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이석현은 2남 1녀 중 장남으로서 농사일을 도우면서도 전교 1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IQ 147을 기록해 '이천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이석현은 중학교 입학시험에서 전액 장학금을 받기 위해 공부했지만 2등으로 아쉬운 반액 장학금을 수여받았다. 이러한 경험은 그에게 더욱 강한 학업 의지를 심어주었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한시를 공부하며 뛰어난 한자 실력을 쌓았다. 이석현은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입학하였으나 학생운동에 뜻을 두고 법학으로 전공을 바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재입학하였다.

 

대학 시절, 이석현은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며 지하신문을 발행하고 여러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이석현은 군복무 중 징집 거부로 기소되었으나, 교수의 도움으로 징역형 대신 군입대를 통해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는 것을 막았다.

 

대학 졸업 후 보험회사에 취직했으나, 운동권 시절의 선배와 동료들의 권유로 다시 운동권 활동에 전념하게 되었다.

 민주화추진협의회 시절

 

이석현은 1980년 민주연합청년동지회(연청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며 민주화 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이석현은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으나 구속되지는 않았다. 운동권 생활에 지치던 이석현은 안정된 삶을 위해 다시 회사생활로 돌아가려 했으나, 전 의원 이협의 설득으로 1984년 운동권 생활에 전념하게 된다. 그 후 1년간은 어려운 상황에서 생계를 이어갔다.

 

 정치 활동

 

이석현의 정치적 경력은 김대중의 동교동계에서 시작되었다. 이석현은 김대중과의 식사 후 요구에 따라 사회 전반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해 제출하였고, 이로 인해 김대중의 비서로 채용되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 평화민주당 후보로 출마하며 첫 공식 정치 활동을 하였다.

 

이후 이석현은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으나, 명함 파문으로 정치적 위기를 겪기도 했다. 이석현은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하였으나,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국회 보건복지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이석현은 2008년 제18대,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당선되었고, 2014년부터 제19대 국회 후반기 국회부의장을 역임하며 정치적 입지를 더욱 확고히 하였다. 이석현은 지속적으로 지역구 관리와 지지율 향상을 위해 노력하며,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석현의 정치 경력은 이석현의 젊은 시절부터 시작된 민주화 운동과 그에 따른 정치적 여정이 서로 얽혀 있으며, 이는 이석현이 대한민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기여한 바를 나타내는 중요한 이정표로 자리잡고 있다.

 

 이석현: 대한민국의 제19대 후반기 국회부의장과 2016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

 

이석현은 대한민국 제19대 후반기 국회부의장으로서, 6선 의원의 경력을 쌓아왔다. 이석현은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첫 발을 내딛은 후, 제14대부터 제20대 국회의원으로서의 임기를 수행하였다. 특히, 이석현은 민주화 과정에서의 활동과 의원으로서의 비중 있는 역할로 주목받고 있다.

 생애와 정치적 경력

 

이석현은 익산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한 후, 남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진학하였다. 이석현의 학창 시절은 전교 1등을 유지하는 등 뛰어난 학업 성적을 보였으며, 학생운동에 관심을 두고 민중을 돕기 위해 법을 공부하기로 결심하였다. 이후 이석현은 민주화추진협의회와 같은 운동권 활동에 참여하며 정치적 경로를 확립하게 된다. 김대중과의 인연으로 정치적 경력이 본격화되었고, 이석현은 평화민주당 후보로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다.

 

이석현은 이후 국회의원으로서의 활동을 이어가며 여러 중요한 법안과 정책에 참여하였고, 특히 보건복지위원장으로서의 임기가 주목받았다. 이석현은 2014년부터 제19대 국회 후반기 국회부의장으로서 의장직을 수행하였다.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

 

2016년, 이석현은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2월 23일부터 시작된 제340회 국회에서, 이석현은 의장직을 수행하며 여당 의원들의 고성을 차단하는 데 힘썼다. 이석현은 필리버스터 중 많은 의원들이 국민의견을 반영하여 발언할 수 있도록 배려하며, 적극적으로 중재자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이석현은 김경협 의원이 발언하는 동안 여당 의원들이 비격식적인 발언을 하자 경고하며 국회법 제145조에 근거해 퇴장을 권고하였다. 이는 필리버스터의 원활한 진행을 위한 조치로, 의원 간의 긴장된 상황 속에서도 이석현의 냉철한 판단력이 빛났다.

 

이석현은 또한, 의원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강조하며 화장실 다녀오는 문제에 대한 허용을 제안하였다. 이와 같은 발언은 국회 운영의 유연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이석현은 "소변 안 보고 연설하느냐, 소변 보고 연설하느냐는 진실하고는 아무 관계 없는 껍데기입니다."라는 명언을 남기며, 인간 존중의 의도를 드러냈다.

 

 

이석현의 정치적 여정은 대한민국 민주화 과정의 중요한 일면을 반영한다. 이석현의 국회부의장으로서의 역할과 2016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에서 보여준 리더십은 이석현이 단순한 정치인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가치와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진정한 공직자로서의 면모를 지닌 인물임을 잘 보여준다. 이석현의 발언과 행동은 앞으로의 정치적 행보에서도 국민의 기대를 받는 기반이 될 것이다.

 

 이석현: 제20대 국회의원과 이석현의 정치 여정

 

이석현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제20대 국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6선 의원으로서 이석현의 정치적 경력은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으며, 그 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국회 내에서의 입지를 더욱 굳혔다.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이 승리함에 따라 이석현은 유력한 국회의장 후보로 거론되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정세균 의원이 의장직에 선출되면서 아쉬움을 남겼다.

 

 20대 국회의장 후보로의 도전

 

이석현은 제20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 후보로 다시 언급되었으나 경선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후 21대 총선에서 7선 의원으로 출마할 계획을 세웠고, 이를 통해 다시 국회의장직에 도전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2020년 민주당 경선에서 민병덕 후보에게 패배하며 의장직에 대한 꿈은 잠시 미뤄졌다. 이석현은 경선 결과를 수용하고,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유지하며 활동을 지속했다. 이석현은 지역구 사무실을 운영하고, 트위터를 통해 정치적 견해를 표현하며 여전히 정치적 존재감을 드러냈다.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 위촉

 

2021년 8월 27일, 이석현은 문재인 대통령에 의해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으로 위촉되었다. 이는 이석현의 정치적 역량과 경험을 인정받은 결과로, 이석현은 이 역할을 통해 평화 통일을 위한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정권 교체 이후, 2022년 8월 18일 윤석열 대통령에게 사직서를 제출하며 새로운 정치 환경에 맞춰 재정비를 하였다.

 

2023년에는 이낙연 의원과의 친분을 바탕으로 더불어민주당에서 탈당하며 독립적인 정치 행보를 예고했다. 2024년 1월 3일에는 익산시 갑 지역에 이낙연 신당 소속으로 출마할 가능성을 시사하며 정치적 활동을 이어갔다.

 선거 출마와 결과

 

2024년 3월 22일, 이석현은 서울 강북구 을 선거구에 후보로 등록하였다. 그러나 지역 연고가 부족했던 탓에, 6선 중진 의원임에도 불구하고 저조한 득표율로 낙선하였다. 이는 정치인의 특성상 국회의원으로서의 활동이 잠시 멈추면 대중의 기억 속에서 잊힐 수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논란과 발언

 

이석현은 정치적 경력 속에서 여러 논란에 휘말리기도 했다. 2015년 종교인 과세와 관련하여 "재벌에 대해서는 법인세를 감세해주는 정부가 신앙인이 하느님과 부처님께 바친 돈에까지 세금을 물린다면 저승에서 무슨 낯으로 그분들을 뵐 것이냐"라는 발언을 하며 논란을 일으켰다. 이는 종교 편향적 발언으로 간주되어 비판을 받았다.

 

또한, 천안함 피격 사건에 대한 음모론을 제기하며 정부의 공식 입장과 배치되는 주장을 하여 논란이 되었다. 이러한 발언은 이석현이 종종 경솔한 입장을 보였음을 나타내며, 정치인으로서의 신뢰성을 위협할 수 있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이석현의 정치 여정은 민주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고, 국회에서의 활발한 활동을 통해 많은 경험을 쌓았다. 그러나 이석현의 정치적 경력은 여러 논란과 함께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이석현은 앞으로도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정치인으로서의 길을 걸어갈 것으로 기대된다. 정치적 환경의 변화 속에서도 이석현의 입지와 역할은 중요하게 여겨질 것이다.

 

 이석현: 미혼 정치인의 특별한 여정

 

이석현은 대한민국의 정치계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2016년 기준으로 만 65세가 되어 법적으로 '노인'으로 분류되었지만,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석현은 73세인 현재도 동안 외모로 유명하며, 60대 초반으로 보일 정도로 건강한 모습으로 대중 앞에 서 있다. 이석현은 헌정 사상 미혼 남성으로 최다선 의원, 국회 부의장, 최고령 국회의원이라는 세 가지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이석현의 정치적 경력은 단순히 숫자에 그치지 않으며, 대중의 관심을 끌고 있는 여러 요소가 있다.

 정치적 배경과 선거 이력

 

이석현의 정치 여정은 1985년 신한민주당 창당을 시작으로 시작되었다. 이석현은 다양한 정당을 거치며,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처음 당선된 후, 2004년 열린우리당 소속으로 3선에 성공하였다. 이후에도 민주당과 더불어민주당 등에서 활동하며 총 6선의 국회의원으로서의 경력을 쌓았다. 이석현의 정치적 여정은 많은 이들에게 감명 깊은 스토리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석현의 경력은 결혼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이야기로 가득하다.

 

 결혼 여부와 개인적 선택

 

이석현은 미혼으로 지내고 있으며, 이석현의 결혼 여부에 대한 논의는 종종 네티즌들 사이에서 화제가 된다. 이석현은 젊은 시절에 여러 여성과의 연애를 했지만, 30대에 민주화운동에 투신하면서 결혼에 대한 책임감이 크다는 이유로 깊은 관계로 발전하는 것을 포기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는 정치인으로서의 선택이 개인적인 삶에 큰 영향을 미친 사례로, 많은 이들에게 흥미로운 주제로 남아 있다.

 

 정치적 이미지와 소속 정당

 

이석현은 정치인으로서의 특유의 화법과 성격 덕분에 귀여운 이미지로 대중에게 알려져 있다. 이석현의 정치적 입장은 원내부대표를 맡지 못하는 등의 어려움 속에서도 중립적인 성향을 유지하며, 다양한 계파와의 조화를 이룬 결과로 국회 부의장직에 오를 수 있었다. 이석현은 정치적 경과를 통해 여러 정당을 거치며 민주당의 여러 변화를 함께 겪었다. 최근에는 무소속으로 활동하며, 새로운미래당을 창당한 이후 그 변화의 여정을 이어가고 있다.

 논란과 사찰 사건

 

이석현의 정치 경력은 논란과 함께하는 경우도 많았다. 2009년 이명박 대통령의 떡볶이집 방문을 비난하며 서민 경제에 대한 발언을 한 이후, 이를 왜곡 보도당해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이 사건은 이석현이 국무총리실 소속 공직윤리지원관실에서 사찰을 당한 이유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이와 같은 논란은 이석현이 공적 영역에서 활동하면서 겪는 정치인의 고충을 보여준다.

 

 

 

이석현의 정치 여정은 미혼 정치인의 특별한 사례로, 다양한 경험과 역사를 담고 있다. 이석현의 결혼과 개인적 선택, 정치적 이미지, 그리고 논란들은 그를 더욱 흥미로운 인물로 만들어준다. 현재 이석현은 새로운 정치적 도전을 위해 힘쓰고 있으며,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되는 인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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