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청래는 대한민국 제17·19·21·22대 국회의원으로,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에서 태어났다. 현재는 서울특별시 마포구 성산동에 거주하며, 하동 정씨 본관을 갖고 있다. 175cm에 74kg의 체격과 B형 혈액형을 가지고 있다. 정청래는 건국대학교에서 산업공학을 전공하고, 이어서 서강대학교에서 북한통일정책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정치 경력으로는 생활정치네트워크 국민의 힘 초대대표, 열린우리당 전자정당위원회 위원장, 그리고 여러 당이나 모임에서 주요한 역할을 맡은 바 있다.
정청래는 지역구인 서울 마포구 을을 대표하는 의원으로서, 제17대부터 제22대까지 다섯 번의 국회의원 선거를 거쳤다. 그동안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등 다양한 위원회에서 활약했으며, 특히 제21대 국회 후반기에는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더불어민주당에서는 수석최고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가계부채특별위원회 위원장 등의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정청래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제17대, 19대, 21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생애는 독특한 경험과 행적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의 정치 경력은 그의 특별한 과거에서 비롯된다.
정청래는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에서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은 가난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 홍역으로 인해 부모는 5명의 아이를 잃었고, 이는 그의 가정에 큰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그는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끈기를 갖고 학업에 열중했다. 보문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건국대학교 산업공학과에 입학하여 학업에 전념했다.
하지만 그의 삶은 그의 학업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1989년, 정청래는 미 대사관저 점거 사건을 주도하여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그는 투옥되었고, 그 후 2년간의 복역을 거쳤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열정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출소 후, 그는 정치 활동을 시작하고 꾸준한 노력 끝에 국회의원으로 성공했다. 이는 그의 정치적 용기와 열정이 어떤 환경에서도 굴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정청래의 이력은 그가 어려운 환경에서도 희생과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고 꿋꿋이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그가 대한민국 정치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를 준다. 정치뿐만 아니라 삶의 여러 영역에서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포기하지 않고 꿋꿋이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1992년에 출소한 정청래는 이른바 '길잡이 학원'을 창업하였다. 그는 과거 재수 시절 친구인 양태회와 함께 이 학원을 설립하였는데, 양태회는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약칭 전대협)의 모태가 된 ‘자주민주통일’이라는 조직을 이끌었던 인물로, 그의 지식과 경험이 학원 운영에 큰 도움이 되었다. '길잡이 학원'은 서울특별시 마포구 성산동에 위치하였으며, 초등학생과 중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보습학원으로 운영되었다.
이 학원은 처음에는 정청래가 영어를, 양태회가 국어를 가르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는 그들이 과거의 학문적 배경에 따라 선택된 것으로, 미 대사관저 점거 테러 사건과의 아이러니한 연관성도 갖고 있다. 그러나 학원은 곧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단지 2년여 만에 엄청난 규모의 대형학원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이 학원은 강도높은 교육 방식으로 인해 '가면 애 잡는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유명해졌다. 이런 체벌적인 교육 방식은 학원의 성공을 가져다 주었지만, 학생들의 거부감으로 이어져 결국 학원은 문을 닫게 되었다.
양태회는 학원을 접은 후 비상교육을 창업하여 대표적인 사교육 재벌로 성장하였으며, 정청래는 이후 정치계에 진출하여 거물급 정치인으로 성공하게 되었다. 이렇듯 '길잡이 학원'은 그들의 삶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었으며, 그의 학원 창업 경험은 그 후의 정치 활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정청래는 2002년경 노사모에 가입하여 활동하며 '싸리비'라는 닉네임으로 인터넷 상에서 활발한 글쓰기를 통해 알려졌습니다. 그 후에는 명계남, 문성근 등과 함께 '인터넷 정당 정정당당'을 준비하였는데, 이는 인터넷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지역구 전환이 가능한 정당을 만들겠다는 계획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사무실을 마련하고 상근자 30여 명을 모아 준비를 진행했습니다.
그는 이후에도 노무현 후보를 돕기 위한 유권자 운동을 하였으며, 특히 '대학교 내 부재자 투표함 설치운동'으로 활동하였습니다. 또한 효순이와 미선이를 추모하는 뱃지를 제작하여 전국에 배포하기도 했습니다.
2002년 12월 19일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 후보가 당선된 이후에는 여당인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였습니다.
이어 2004년에는 서울특별시 마포구 을 선거구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습니다. 이후 국민참여연대(국참연)의 대변인을 맡아 활동하였으며, 이 당시 국참연은 당내에서 유시민과의 관계로 인해 갈등이 빚어졌습니다.
정청래는 유시민을 공개적으로 여러차례 비난하며 당내에서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유시민을 "간신"이라 비판하고, 당내 분열을 초래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입장은 노무현 정부 말기인 2007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을 앞두고 "유시민이 당내 대선 주자인 정동영의 당선을 고의로 방해한다"는 주장으로 더 강화되었습니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 통합민주당 소속으로 다시 서울특별시 마포구 을 선거구에 출마했지만 낙선하였습니다. 이후에도 그는 계속해서 정치 활동을 이어나가며 꾸준한 노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정청래: 정계 활동의 갈래
2012년, 정청래는 19대 총선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마포구를 두고 선거를 치르며 재입성하였다. 그 해 민주당의 강력한 선거전에서 경쟁자들을 제압하고 당선되었다. 그후, 정청래 의원은 당내에서 특별위원회에 자주 참여했으며, 주로 권력형 비리와 관련된 부분에 집중하였다. 그는 '국정원 댓글 진상조사위원회' 간사를 맡았고, 다양한 사건들을 조사하는 진상조사위원회와 특위 위원으로 활동했다.
2015년, 정청래는 새정치민주연합의 새로운 당 지도부를 뽑는 전당대회 선거에서 최고위원에 당선되었다. 이는 당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하겠다는 슬로건과 함께 지지층의 호응을 얻은 결과였다. 하지만, 그의 입담과 논란으로 불편한 시간도 있었다. 그는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에서 11시간 40분의 연설을 펼쳤으며, 이는 최장시간 연설자가 되었다. 이후에도 방송 활동을 하고 판도라에 자주 출연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2016년 20대 총선에서 컷오프 당하는 빌미가 되었다. 이는 정청래가 논란을 일으키며 여당의 공격수로 인정받음에도 불구하고 발생한 일이었다. 이후 당내에서 구제론이 제기되었고, 정청래는 재심 신청을 했지만 기각되었다. 이에 정청래는 더불어민주당 소속으로 총선에 출마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사건은 정청래 지지자들과 민주당 내에서 큰 후폭풍을 일으켰으며, 결국 정청래는 당 잔류를 선언하고 출마를 포기하게 되었다.
이후 정청래는 지역위원장으로 임명되어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그의 정치적 삶을 이어갔다. 그의 지역구에서의 활약은 손혜원 의원의 공천탈락 후 이어졌고, 결국 손혜원 의원이 후보로 나오면서 정청래가 선거운동을 도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지역위원장으로 임명되며 마포구를 대표하는 지역의 리더로서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되었다.
정청래는 막말 논란과 불행한 사건을 겪으며 정치적 활동을 계속했지만, 그의 정치적 삶은 여전히 이목을 끌고 있다. 그의 결정과 행동들은 끊임없는 관심을 받으며, 그의 이야기는 정치계의 한 갈래로서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