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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청래 - 대한민국 제17·19·21·22대 국회의원. 그에 대해 알아보자.Araboza

시사맨 2024. 5. 10.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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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청래는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에서 1965년 4월 18일에 태어났다. 현재는 서울특별시 마포구 성산동 성산월드타운대림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다. 정청래는 하동 정씨 본관을 가지고 있으며, 가족으로는 부인인 김인옥과 장남 정한백, 차남 정한결, 그리고 3남 정한솔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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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청래는 진산국민학교와 진산중학교를 졸업한 후 보문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이어 건국대학교 공과대학에서 산업공학을 전공하고 학사학위를 취득했다. 또한, 서강대학교 공공정책대학원에서 북한통일정책학을 전공하여 석사학위를 받았다.

 

정청래는 병역면제자로, 신체 사항은 키 175cm, 몸무게 74kg, 혈액형 B형이다.

 

정청래는 2015년부터 현재까지 대한민국 제17·19·21·22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초기에는 열린우리당, 그 후 민주통합당, 그리고 더불어민주당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그의 정치 경력은 다양하며, 국회에서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에 소속되어 활동했고, 민주통합당과 더불어민주당의 수석최고위원을 역임했다. 그리고 국회에서 후반기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정청래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제17대, 19대, 21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생애를 살펴보면, 1965년 음력 4월 18일(양력 5월 18일),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석막리에서 아버지 정해일과 어머니 박순분 사이에서 태어났다. 10남매 중 막내로, 현재는 5남매만 생존하고 있다고 한다. 고향 금산군에서는 석막초등학교와 진산중학교를 다녔으며, 대전 보문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대학교 입학 후 정청래는 건국대학교 공과대학 산업공학과에 입학했다. 학창 시절부터 활발히 활동하며, 대학 입학 직후에는 과 대표에 출마하여 '나의 꿈은 대통령'이라고 밝혔다. 그 후에는 운동권 활동에 참여하며, 대학교 재학 중에는 전대협 산하 서총련에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그러나 1988년 어느 날, 새벽 2시에 국가안전기획부 요원들에게 끌려가서 눈이 가려진 채 무차별 폭행을 3시간 동안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이름과 성별 등 그 사람들을 전혀 모른다고 한다.

 

1989년 10월 13일, 서울 정동에 위치한 주한미국대사 관저를 점거하여 폭탄 투척 및 방화 미수 사건을 주도한 정청래의 행동은 국내 정치사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는 대사관저 점거를 통해 노태우 대통령의 매국 방미 반대와 그레그 주한미국대사의 추방을 요구했다. 이러한 행위는 대사관저에 방화 시도 및 사제 폭탄 투척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대치하던 경찰에 체포된 정청래는 1989년 11월 8일 투옥되었다. 이후에는 다수의 혐의로 기소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다행히도 직접 제작한 사제 폭탄은 엉터리로 제작되어 터지지 않았고, 대사관저가 내화 처리되어 있어 불이 붙지 않아 사건은 미수에 그쳤다.

 

그러나 복역으로 인해 병역에서 제적되고, 이후에는 보충역 및 소집면제 처분을 받게 되었다. 2년간의 복역 기간을 거쳐 1991년 출소한 후,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완전히 사면복권되었다. 이를 계기로 정청래는 학원업을 접고 정치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미 대사관저 폭탄 테러 사건은 그가 정치인으로서 중요한 경험으로 작용했다. 이 사건을 통해 정청래는 운동권 출신이라는 바탕 위에서 정치인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의 결정적인 행동력과 끈기는 이후 정치 무대에서 그를 주목할 만한 인물로 만들어갔다.

 

1992년에 출소한 직후, 정청래는 재수 시절 친구인 양태회와 함께 '길잡이 학원'을 창업했다. 양태회는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의 동지로써 뛰어난 활동가로 알려져 있었으며, 학원은 서울 마포구 성산동에 위치하여 초등학생과 중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보습학원으로 운영되었다. 이 지역은 당시 서울에서 가장 큰 아파트 단지 중 하나였고, 아직도 초등학생들이 많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정청래는 공과대 출신이었지만, 수학이 아닌 영어를 가르쳤으며, 학원 운영은 미 대사관저 점거 테러로 인해 이러한 결정이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반면 양태회는 언어 전공 출신으로 국어를 가르쳤다. 비록 정청래는 교육 경험이 없었지만, 재수 시절의 경험과 문법 중심의 강의로 학원을 운영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원장들이 청소와 잡일까지 모두 처리해야 했지만, 그 후에는 길잡이 학원이 높은 수요를 얻으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학원은 2년여 만에 엄청난 규모로 성장하여 초등학생과 중학생 사이에서는 스파르타식으로 유명해졌다. 하지만, 지나친 체벌과 학생들의 불만으로 인해 학생 수가 줄어들면서 1996년 양태회와 정청래는 학원을 갈라서 문을 닫게 되었다.

 

이후 양태회는 비상교육을 창업하며 대표적인 사교육 재벌로 성공했고, 정청래는 정치 분야에 진출하여 거물급 정치인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은 그의 정치 경력에 큰 영향을 미쳤다.

 

2002년, 정청래는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기 위해 노사모에 가입했으며,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싸리비'라는 닉네임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이후에는 '인터넷 정당 정정당당'을 설립하고 지역구 전환을 가능케 하는 이니셔티브를 취하며, 실제로 사무실을 마련하고 30여 명의 상근 인력을 모집하여 준비했다.

노무현 후보를 돕기 위한 유권자 운동에 힘썼으며, 특히 '대학교 내 부재자 투표함 설치운동'으로 활동했다. 그 와중에도 미선이 효순이 사건에 대한 애도의 뜻을 표하며 국민들의 마음을 나눴다.

 

2002년 12월 19일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자 열린우리당에 가입했다. 2004년에는 17대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어 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했다. 이후에는 '개나리 봉사단'이라는 조직에 합류하여 정동영의 편으로 활동하면서 정계에서의 역할을 더욱 강화해 나갔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는 서울특별시 마포구 을 선거구에서 출마하여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2005년에는 국민참여연대의 중요한 조직인 국민참여연대의 대변인을 맡아 국정의 중요한 부분에 관여하였다.

 

정청래는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기 위해 유시민과의 갈등을 소위 "공개전"으로 치부하여 많은 언론에 비판을 받았다. 이에 대한 논란은 지속되었지만, 그는 국회의원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19대 국회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는 민주통합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마포구 을 선거구에서 출마하여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이후에는 국회의원으로서 다양한 법안을 발의하고 토론에 참여하며, 국회의 중요한 역할을 해내었다.

 

그러나 막말 논란 등의 이슈로 논란을 빚었고, 20대 총선에서는 컷오프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렇지만 정청래는 꾸준한 정치 활동을 통해 국회의원으로서의 역할을 최선을 다하며 국가와 국민을 위해 노력해왔다.

 

정청래 의원의 정치 경력은 그가 2016년 20대 총선 컷오프 이후에도 여전히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어떻게 이러한 힘든 시기를 극복하고 투지를 유지했을까요?

 

정청래 의원은 컷오프 이후에도 정당 내부에서의 갈등과 논란에 직면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내에서의 역할을 확실히 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결국에는 마포구 을 지역구 후보로 성공적으로 당선되었습니다. 이러한 성과를 거두기 위해 그가 취한 전략과 행동은 어떠한 것들이 있었을까요?

 

또한, 정청래 의원은 국회에서의 활동을 통해 다양한 법안을 발의하고 있습니다. 특히,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의 도입이나 불법 주정차에 대한 강력한 처벌 등 시민들의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법안들을 주도적으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법안들이 현실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지, 그 영향력은 어떻게 평가될까요?

 

마지막으로, 정청래 의원은 최근 국회에서의 일정 중 친문과 친명 간의 갈등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표명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정당 내 경험을 바탕으로 이러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제언이 정당 내 갈등의 해소에 도움이 될 수 있을지, 혹은 더 복잡한 정치적 상황에서의 효과는 어떻게 될지 예측해 볼 수 있을까요?

 

정청래 의원은 컷오프 이후에도 끊임없는 노력과 투지로 정치적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의 미래에는 무엇이 기대되며, 그의 행보는 한국 정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해야 할 부분입니다.

### 정청래: 정치를 품은 노래

 

2006년 9월 16일, "북한의 군사력이 더 세다? 이는 전형적인 사기일 뿐"이라는 문구로 시작된 칼럼은 정청래 의원의 정치적 철학을 엿볼 수 있는 한 장면이었습니다. 그로부터 18년이 흘렀지만, 정 의원은 그의 정치적 신념을 꾸준히 지켜왔습니다. 이는 그가 자신의 행동과 말을 통해 계속해서 증명하고 있습니다.

 

2013년 9월에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JTBC의 손석희 앵커를 거절했던 사실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2015년에는 그의 입장이 변화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정청래 의원이 고집 센 정책에 구애받지 않고, 새로운 정보와 상황에 따라 태도를 수정하는 데서 온 것으로 보입니다.

 

2016년에는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 대표가 김종인 전 의원을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영입한 뒤에도 정청래 의원은 환영의 뜻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전에는 김종인과 함께 일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한 사실을 고려할 때, 이것은 그의 유연성과 새로운 협력 기회를 활용하는 능력을 보여줍니다.

 

정청래 의원의 정치적 결정에 대한 비판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2014년 박영선 비상대책위원장 체제에서 이상돈 교수의 영입을 반대했지만 김종인 전 의원의 영입을 환영한 것은 일관성이 없다는 비판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정 의원은 당시 상황과 배경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처럼 정청래 의원은 복잡한 정치적 상황에서도 자신의 원칙을 지키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의 정치적 변화와 선택은 그가 꾸준히 변화하고 발전하려는 의지와 노력을 보여줍니다. 더불어민주당의 금태섭 전 의원 징계에 관한 발언과 같은 일부 발언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이는 그의 정치적 성격과 역량을 논의할 때 고려해야 할 부분입니다.

 

정청래 의원은 또한 인터넷 커뮤니티와 팟캐스트를 통해 꾸준한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그의 정치적 이념과 신념을 널리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찾고 있습니다. 그의 행동과 선택은 그가 정치적 존재로서의 역할을 꾸준히 고민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마무리로, 정청래 의원은 정치를 통해 국민을 섬기고, 나아가 국가의 발전에 기여하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끈기와 열정은 우리의 미래에 밝은 희망을 남기고 있습니다.

정청래: 민주당 내의 정치적 차트를 뒤흔든 남자

 

한때는 그의 이름을 언급하면 '보수 성향', '막말', '통일 문제', '지역구 사업' 등으로 묶여 논란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 정청래라는 인물을 파헤쳐보면, 그의 모습은 상상 이상으로 다채롭고 복합적이다.

 

가장 먼저 그의 가족 배경부터 살펴보자.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놀라운 출발점이다. 그의 인생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가족과의 대화와 협력 속에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배경이 그를 어떤 인격체로 발전시켰을지 상상해보기만 해도 흥미롭다.

 

그가 거쳐온 직업은 그만큼 다양했다. 보습학원 운영 경험을 비롯해 약사로서의 직업도 뒤에 숨겨진 이야기 중 하나이다. 정청래라는 이름을 만나보기 전의 그의 삶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의 이야기는 한 권의 소설처럼 풍부하고 다채로운 것 같다.

 

그가 정치 무대에 오르면서 민주당 내에서 강력한 목소리로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입담 뒤에는 신중하게 준비된 그의 철학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그가 시사 프로그램에서 현안에 대해 논의하거나, 팟캐스트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전하는 것에서도 엿볼 수 있다.

 

또한, 그의 인간미와 유머 감각도 놀랍다. 상쾌한 목소리와 특유의 말투는 듣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끌어당긴다. 이러한 점이 그를 오랜 친구들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새로운 친구들과의 만남을 즐겁게 한다는 것을 설명해준다.

 

하지만, 그의 모든 것이 찬란한 것만은 아니다. 그의 과거와 현재의 행적 중 일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예를 들어, 군 복무 시절의 갑질 논란은 그의 이미지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러나 그의 지지자들은 이러한 부정적인 측면을 넘어서 그가 이룬 성취와 정책적 업적을 중시한다.

 

정청래는 단순한 정치인이 아니다. 그의 삶과 이야기는 우리에게 한 가지 교훈을 남겨준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라났든, 우리가 노력하고 꿈을 키우며 살아가는 한, 우리는 모두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앞으로 그가 또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 낼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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