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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스 히딩크 : 2002 월드컵 신화의 주역, 박지성의 유럽 진출을 도운 한국 축구계의 레전드이자 은인. 그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시사맨 2024. 7. 28.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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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스 히딩크는 네덜란드의 축구계에서 명성을 떨친 인물이다. 1946년 11월 8일 헬데를란트주 비스 파르세벌트에서 태어난 히딩크는 뛰어난 체격 조건(182cm)을 갖추고 중앙 미드필더로 활약했다. 더 흐라프스합을 시작으로 PSV 에인트호번, NEC 네이메헌 등의 팀에서 선수로 활동한 히딩크는, 은퇴 후에도 축구계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며 그 명성을 이어갔다. 히딩크는 감독으로서 더욱 빛났다. PSV 에인트호번을 시작으로 페네르바흐체 SK, 발렌시아 CF, 레알 마드리드 CF, 레알 베티스, 그리고 첼시 FC 등 유럽의 여러 명문 구단을 지휘했다. 특히 2001년부터 2002년까지 대한민국 대표팀을 이끌며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를 달성하여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았다. 이후에도 호주, 러시아, 튀르키예, 중국 U-21 팀 등 여러 국가대표팀을 지휘하며 히딩크의 축구 철학과 리더십을 전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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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딩크는 히딩크가 감독을 맡은 팀마다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냈으며, 히딩크의 리더십은 종종 전설로 회자된다. 은퇴 후에도 PSV 에인트호번의 기술 고문으로 활동하며 축구계에 기여하고 있는 히딩크는, 자신의 축구 지식과 경험을 후배들에게 전수하며 네덜란드 축구의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동거인 엘리자베스 피나스와 함께하며, 종교는 없지만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을 바탕으로 다양한 경험을 쌓아왔다.

거스 히딩크: 네덜란드의 축구인

 

거스 히딩크는 축구 역사상 단 9명만이 달성한 유러피언 트레블을 이룬 감독 중 한 명으로, 클럽 팀과 국가대표팀 감독으로서 모두 성공적인 커리어를 남겼다. 히딩크의 주요 성과로는 에인트호번의 1987-88 시즌 유러피언컵 우승과 트레블, 에레디비시 6회 우승, 첼시의 2008-09 시즌 FA컵 우승, 네덜란드의 1998 프랑스 월드컵 4위, 대한민국의 2002 한일 월드컵 4위, 호주의 2006 독일 월드컵 16강, 러시아의 유로 2008 4강 등이 있다. 2021년 9월 10일, 히딩크는 공식적으로 감독 은퇴를 발표하며 54년간의 축구인 경력을 완전히 마감했다.

 

히딩크는 처음부터 프로 선수가 되기보다는 네덜란드 스포츠 전문대학(CIOS)에 입학하여 지도자를 목표로 했다. CIOS 졸업 후 2급 지도자 자격증을 취득한 히딩크는 더 흐라프스합의 코치로 부임했으나, 히딩크의 기량을 높이 산 감독의 제안으로 선수 겸 코치로 활동하게 되었다. 포지션은 중앙 미드필더였으며, 1960년대 당시 에레디비시가 강팀을 제외하고 급료가 부족했던 상황에서도 히딩크는 오전에 유소년을 지도하고 오후에 팀 훈련에 참가하는 투잡을 뛰었다. 또한, 체육 전문대학에 입학하여 체육교사 준비도 병행했다. 이후 PSV 에인트호번과 네이메헌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네이메헌 시절, 히딩크는 체육교사와 선수를 겸임하며 장애아들을 지도하면서 얻은 경험이 후일 감독 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회고했다. 시즌 종료 후에는 미국 리그로 임대되어 조지 베스트와 룸메이트로 지내며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네이메헌에서 은퇴한 후 다시 더 흐라프스합으로 돌아와 코치 생활을 시작했지만, 감독의 요청으로 1시즌 더 리베로로서 선수 생활을 지속했다. 그러나 1981/82 시즌을 끝으로 완전히 은퇴하며 축구인으로서의 다음 단계를 준비했다.

 

히딩크의 축구 경력은 선수 시절의 성실함과 감독으로서의 탁월한 지도력으로 요약된다. 히딩크는 다양한 국가와 클럽 팀을 이끌며 세계 축구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겼다. 히딩크의 축구 철학과 리더십은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은퇴 후에도 여전히 축구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거스 히딩크: 기록

 

거스 히딩크는 네덜란드 출신의 뛰어난 축구인으로, 선수와 감독으로서 모두 눈부신 업적을 쌓았다. 히딩크의 경력은 성공적인 클럽 및 국가대표팀 지휘로 가득 차 있으며, 특히 트레블을 달성한 몇 안 되는 감독 중 한 명이다. 아래는 히딩크의 주요 선수 및 감독 시절의 대회 기록이다.

 

 선수 경력

더 흐라프스합 (1967~1970)

- 트베이더 디비시: 1969

 

 감독 경력

PSV 에인트호번 (1987~1990, 2002~2006)

- 에레디비시: 1986-87, 1987-88, 1988-89, 2002-03, 2004-05, 2005-06

- KNVB 베이커: 1987-88, 1988-89, 1989-90, 2004-05

- 요한 크루이프 스할: 2003

- 유러피언컵: 1987-88

레알 마드리드 CF (1998~1999)

- 인터컨티넨탈컵: 1998

 

첼시 FC (2009, 2015~2016)

- FA컵: 2008-09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1995~1998, 2014~2015)

- FIFA 월드컵 4위: 1998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2001~2002)

- FIFA 월드컵 4위: 2002

 

러시아 축구 국가대표팀 (2006~2010)

-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3위: 2008

 

거스 히딩크의 이력은 단순히 숫자로만 설명할 수 없는 깊이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히딩크는 여러 팀에서 다양한 문화와 축구 철학을 결합시키며 성공을 거두었고, 특히 대한민국의 2002 월드컵 4강 신화는 히딩크의 지도력과 전략적 능력을 입증한 대표적인 사례로 기억된다. 히딩크의 경력은 축구 역사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거스 히딩크: 개인 수상

 

거스 히딩크는 선수와 감독으로서 눈부신 경력을 자랑하는 네덜란드의 축구인이다. 히딩크는 여러 클럽과 국가대표팀을 이끌며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으며, 그 공로로 수많은 개인 상을 수상했다. 아래는 히딩크의 주요 개인 수상 내역이다.

 

 개인 수상

- 월드 사커 올해의 감독: 2002  

  2002년, 히딩크는 대한민국을 2002 한일 월드컵 4강으로 이끌며 전 세계 축구계의 주목을 받았다. 히딩크의 탁월한 지도력과 전략적 통찰력이 인정받아 '월드 사커 올해의 감독'으로 선정되었다.

 

- AFC 올해의 감독: 2002  

  아시아 축구 연맹(AFC)은 히딩크의 대한민국 대표팀에서의 성과를 높이 평가하며 그를 'AFC 올해의 감독'으로 선정했다. 이는 히딩크가 아시아 축구에 미친 긍정적인 영향을 반영한 것이다.

 

- 리누스 미헬스상: 2004-05, 2005-06  

  히딩크는 PSV 에인트호번을 이끌며 두 시즌 연속으로 '리누스 미헬스상'을 수상했다. 이 상은 네덜란드 축구에서 가장 권위 있는 감독상으로, 히딩크의 지도력과 성과를 인정받은 결과였다.

 

- 네덜란드 올해의 스포츠 코치: 2002, 2005  

  히딩크는 2002년과 2005년에 '네덜란드 올해의 스포츠 코치'로 선정되었다. 이는 히딩크가 네덜란드뿐만 아니라 국제 무대에서도 뛰어난 성과를 거둔 것을 반영한다.

 

- KFA 명예의 전당  

  히딩크는 대한민국 축구협회(KFA)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이는 히딩크의 대한민국 축구 발전에 대한 기여와 2002년 월드컵의 성과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수여된 것이다.

- KNVB 평생 공로상: 2007  

  네덜란드 축구 협회(KNVB)는 2007년 히딩크에게 평생 공로상을 수여했다. 이는 히딩크가 네덜란드 축구와 세계 축구에 기여한 바를 기리는 상이다.

 

- RFU 올해의 감독: 2008  

  히딩크는 2008년 러시아 축구 연맹(RFU)으로부터 '올해의 감독'으로 선정되었다. 이는 히딩크가 러시아 대표팀을 유로 2008에서 4강으로 이끈 성과를 인정받은 것이다.

 

-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10년의 팀: 2009  

  2009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는 히딩크를 '10년의 팀'의 일원으로 선정했다. 이는 히딩크의 경력이 2000년대에 걸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반영한다.

 

거스 히딩크의 경력과 수상 내역은 히딩크의 축구에 대한 열정과 탁월한 지도력을 잘 보여준다. 히딩크의 업적은 전 세계 축구 팬들에게 영감을 주며, 히딩크는 여전히 축구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남아 있다.

 

거스 히딩크: 리그 성적

 

거스 히딩크는 여러 클럽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둔 명장으로, 각 팀에서 히딩크의 리더십과 전술적 능력을 입증했다. 아래는 히딩크가 감독으로서 이끈 주요 시즌의 리그 성적이다.

 리그 성적

 

PSV 에인트호번

- 1987/88 시즌: 1위, 경기 34, 승 27, 무 5, 패 2, 득점 117, 실점 28, 승점 59

- 1988/89 시즌: 1위, 경기 34, 승 24, 무 5, 패 5, 득점 78, 실점 31, 승점 53

- 1989/90 시즌: 2위, 경기 34, 승 20, 무 8, 패 6, 득점 94, 실점 36, 승점 48

- 2002/03 시즌: 1위, 경기 34, 승 26, 무 6, 패 2, 득점 87, 실점 20, 승점 84

- 2003/04 시즌: 2위, 경기 34, 승 23, 무 5, 패 6, 득점 92, 실점 30, 승점 74

- 2004/05 시즌: 1위, 경기 34, 승 27, 무 6, 패 1, 득점 89, 실점 18, 승점 87

- 2005/06 시즌: 1위, 경기 34, 승 26, 무 6, 패 2, 득점 71, 실점 23, 승점 84

 

페네르바흐체

- 1990/91 시즌: 5위, 경기 30, 승 12, 무 8, 패 10, 득점 53, 실점 53, 승점 44

 

발렌시아

- 1991/92 시즌: 4위, 경기 38, 승 20, 무 7, 패 11, 득점 63, 실점 42, 승점 47

- 1992/93 시즌: 4위, 경기 38, 승 19, 무 10, 패 9, 득점 60, 실점 33, 승점 48

- 1993/94 시즌: 7위, 경기 38, 승 14, 무 12, 패 12, 득점 55, 실점 50, 승점 40

레알 마드리드

- 1998/99 시즌: 7위, 경기 24, 승 11, 무 4, 패 9, 득점 46, 실점 39, 승점 37

 

레알 베티스

- 1999/00 시즌: 18위, 경기 13, 승 1, 무 6, 패 6, 득점 8, 실점 19, 승점 9

 

첼시

- 2008/09 시즌: 3위, 경기 13, 승 11, 무 1, 패 1, 득점 24, 실점 15, 승점 34

 

안지 마하치칼라

- 2011/12 시즌: 5위, 경기 44, 승 19, 무 13, 패 12, 득점 54, 실점 42, 승점 70

- 2012/13 시즌: 3위, 경기 30, 승 15, 무 8, 패 7, 득점 45, 실점 34, 승점 53

 

거스 히딩크는 각 팀에서 다양한 성적을 기록하며 히딩크의 탁월한 지도력을 입증했다. 특히 PSV 에인트호번에서의 성과는 히딩크의 지도력과 전술적 능력을 잘 보여주며, 각국 리그에서도 성공적인 시즌을 보낸 바 있다. 히딩크의 리그 성적은 히딩크가 얼마나 다재다능하고 유능한 감독이었는지를 보여준다.

거스 히딩크: 여담

 

 이름 표기

거스 히딩크의 이름 표기는 네덜란드어 발음과 관련이 있다. 네덜란드어의 'g' 발음은 /x/로, 한글로 표기하면 '후스' 또는 '휘스' 히딩크가 더 가깝다. 2005년에 제정된 네덜란드어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휘스 히딩크'로 표기하는 것이 옳다.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부임하기 전까지는 국내 언론에서 '후스' 히딩크로 표기했지만, 히딩크 본인이 영어식 발음인 '거스'로 불러달라고 요청한 이후부터는 '거스' 히딩크로 표기되고 있다. 한국에서 히딩크는 성적 부진 시 '오대영'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나, 2002년 월드컵에서 4강 진출 후 '구국의 명장 희동구'라고 칭송받았다. 중화권에서는 '시딩커(希丁克)'로 표기된다.

 

 가족

히딩크의 가문은 고향인 파르세펠트에서 수백 년간 명성을 이어온 집안이다. 히딩크의 아버지 게트 히딩크는 2차 세계대전 당시 겉으로는 시청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암암리에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다. 게트 히딩크는 유대인을 숨겨주거나 배식표를 빼돌려 끼니를 해결해주고, 독일군이 배급하는 식량을 빼돌려 레지스탕스의 군량을 조달했으며, 적지에 떨어진 미군 조종사들을 중립국으로 피신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이러한 공로로 전쟁이 끝난 후 아이젠하워 전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감사장을 받았다.

거스 히딩크는 6명의 형제 중 3남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 개구쟁이로 자주 학교 수업을 땡땡이치곤 했다. 사냥을 좋아하는 외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모험심과 결단력을 키웠다. 히딩크는 축구를 좋아하여 결국 축구 선수가 되었다.

 

 여자친구

히딩크의 가족 관계에 대해서는 2002년 월드컵 당시나 현재나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히딩크는 1살 연하의 이니 히딩크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지만, 2002년 월드컵 이전부터 별거 상태였고, 20살 연하의 엘리자베스 피나스와 교제 중이다. 엘리자베스는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수리남 출신으로, 독일 자동차 브랜드 오펠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다.

 

히딩크와 엘리자베스의 관계는 네덜란드와 서유럽에서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유교적 문화가 강한 한국에서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기자들이 집요하게 이들의 관계를 캐내려 했고, 히딩크는 이에 불쾌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히딩크의 성격을 조절하도록 도와주며 히딩크가 언론을 대하는 태도를 부드럽게 바꾸는 데 기여했다.

 

엘리자베스는 또한 한국에서 장애인 지원 단체를 찾아 자선 활동을 제안했고, 이는 히딩크 재단으로 이어졌다. 히딩크가 한국을 주기적으로 방문하고 재단 활동을 지속하는 데에는 엘리자베스의 영향이 컸다. 엘리자베스는 히딩크에게 '굿바이' 대신 '소 롱(So long)'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라고 조언해, 히딩크는 한국을 떠날 때 '소 롱'이라고 인사했다.

 

엘리자베스는 분쟁조정 관련 석사 학위 과정을 밟고 있었고, 히딩크의 여자친구로서뿐만 아니라 대표팀 선수들과도 친분을 쌓았다. 특히 차두리와는 독일어로 소통하며 남매처럼 지냈다.

거스 히딩크: 여담

 

 가족 및 개인적인 이야기

 

거스 히딩크는 여섯 명의 형제 중 한 명으로 태어났으며, 동생들과의 나이 차가 꽤 큰 편이다. 자서전에서 히딩크는 딸을 한 번 낳아보려 했던 것이 바로 밑 동생이라는 일화와 함께, 형들과 함께 동생을 여자애라고 놀린 적이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이 일화는 히딩크 가족의 독특한 역동성을 잘 보여준다.

 

 팬들과의 상호작용

 

경기 결과에 따라 팬들에게 제공하는 싸인도 히딩크의 독특한 특징 중 하나다. 승리했을 때와 패배했을 때의 싸인에서 글씨 끝의 방향이 달라진다는 점은 히딩크의 섬세한 성격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 같은 작은 차이에도 신경을 쓰는 히딩크의 세심함이 드러난다.

 

 한국 음식에 대한 취향

 

히딩크는 한국 음식에 대해 특별한 애정이 있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갈비와 생선전은 히딩크의 입맛에 잘 맞아 즐겨 먹었다. 흰살생선 튀김인 생선전은 네덜란드의 파넨쿠켄(부침개)과 유사한 점이 많아 위화감이 적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음식적 공통점은 히딩크가 한국 음식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다.

 

 한국에서의 경험

 

네덜란드 방송에서 "한국에 있는 동안 배운 점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히딩크는 "한국의 예절 문화"라고 답했다. 히딩크는 한국의 공공 화장실에서 시계를 두고 잊어버리더라도 훔치지 않고 주인을 찾아 돌려주는 문화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다국어 능력

 

히딩크는 네덜란드어와 영어 외에도 독일어와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 유럽에서는 언어가 비슷한 경우가 많아 다국어에 능통한 것이 드물지 않다. 히딩크는 차두리와 독일어로 소통하며, 2002년 월드컵 동안 스페인어나 독일어로 기자들과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했다. 한국어는 별도로 배우지 않았으나, 스페인어와 영어를 익힌 이유는 이들 언어가 세계 축구 강팀들의 주요 언어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히딩크를 구하라' 게임

 

2002년 월드컵 중에는 "히딩크를 구하라"라는 플래시 게임이 등장했다. 이 게임에서는 유상철이 주인공으로, 아폴로 안톤 오노가 당시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에게 히딩크를 납치당한 이야기를 다룬다. 게임의 보스는 부시로 설정되어 있으며, 김동성을 소환해 적을 제거하는 필살기까지 등장한다. 이 게임은 당시 한국의 반미 감정이 극에 달했던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과 미군 여중생 압사 사건 등이 국민 정서에 큰 영향을 미쳤던 시기에 제작되었다.

 

 동계종목에 대한 기여

 

히딩크는 축구뿐만 아니라 동계종목에도 영향을 미쳤다. 보프 더용 코치가 한국행을 망설이던 중, 히딩크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에서의 사랑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여 한국행을 이끌었다. 이러한 히딩크의 영향력은 한국 스포츠 전반에 걸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데 기여했다.

거스 히딩크: 2002년 월드컵과 그 이후의 여정

 

 명예 서울특별시민 및 대한민국 명예국민

 

2002년 한일 월드컵의 성공적인 마무리 이후, 거스 히딩크는 서울특별시청을 방문하여 명예 서울특별시민증을 수여받았다. 그러나 당시 샌들과 반바지 차림으로 참석한 히딩크의 모습은 논란을 일으켰다. 또한, 히딩크는 대한민국 명예국민으로도 선정되어, 이로써 두 가지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첫째, 한국을 무비자로 방문할 수 있으며, 둘째, 명예국민이 신청하면 심사 없이 즉시 한국 영주권(F5)을 받을 수 있다. 부산광역시에서도 명예시민증을 받으며, 히딩크의 한국과의 인연을 더욱 깊게 했다.

 

 지도자 스타일과 철학

 

히딩크 감독의 지도자 스타일 중 하나는 골키퍼의 역할에 대한 신념이다. 히딩크는 어떤 상황에서도 골대를 비워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며, 골키퍼가 공격에 나서는 것을 강력히 반대한다. 이로 인해 2002년 월드컵에서 김병지를 단 한 번도 출전시키지 않고 이운재만을 고집했다. 이러한 결정은 특히 이탈리아와의 16강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경기 내내 0:1로 뒤지던 상황에서도 이운재가 골문을 지킨 덕분에 추가 실점 없이 경기를 연장전까지 끌어갔고,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이 승리하여 8강에 진출할 수 있었다. 만약 이운재가 공격에 나섰다면, 이탈리아가 승리했을 가능성도 있었던 만큼, 히딩크의 신념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유튜브와 가상 주민등록증 논란

 

2002년 월드컵 동안 한국이 16강에 진출하자, 한 누리꾼이 거스 히딩크의 가상 주민등록증을 만들어 인터넷에 유포했다. 이로 인해 일부 사람들은 히딩크의 주민등록번호가 유출된 것으로 오해하기도 했다.

 축구와 그 이상의 활동

 

히딩크는 축구 외에도 다양한 활동을 했다. 2003년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했으며,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는 미국 방송사 폭스 스포츠의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다. 또한 TV조선의 예능 프로그램 <히딩크의 축구의 신>에 출연하기도 했다.

 

히딩크는 축구 외에도 야구에 대한 애정을 보였다. 미국 체류 중 유소년 야구 지도자 자격증을 취득하며, 네덜란드의 야구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다. 네덜란드는 본토에서는 야구에 큰 관심이 없지만, 해외 영토인 퀴라소에서는 유명한 야구 선수를 배출하고 있다.

 

 건강과 개인적 사정

 

2021년 5월 15일, 히딩크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확진 판정을 받았다. 많은 팬들이 히딩크의 회복을 기원했으며, 현재는 회복된 상태이다. 그러나 같은 해 유상철 감독이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히딩크는 2002년 월드컵의 동료이자 애제자를 잃는 슬픔을 겪었다.

 

2021년 12월에는 네덜란드의 한 부부가 태국에서 발견한 삼성 카메라의 주인을 찾기 위해 히딩크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며, 히딩크는 사진을 보고 한국인임을 확신하고 주인을 찾는 데 도움을 주었다.

 현재와 미래

 

시간이 흘러 2023년, 히딩크는 77세의 고령으로 얼굴살이 늘어나고 백발이 되어 온화한 할아버지의 모습이 되었다. 2000년대 이후 출생한 이들 중 일부는 히딩크를 잘 모를 수 있지만, 2002년 월드컵에서의 활약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히딩크는 한국 축구의 전설 중 하나로, 히딩크의 트레블 달성 기록은 많은 축구 팬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사실일 수도 있다. 네덜란드 PSV 에인트호번 감독 시절, 1987-88 시즌에 에레디비시, KNVB컵, 유러피언컵에서 모두 우승하며 트레블을 달성했다.

 

히딩크가 한국 축구에 남긴 조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2004 아테네 올림픽과 2006 독일 월드컵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수비진의 세대교체와 유럽 리그 진출을 위한 조언은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히딩크 감독이 체력 단련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도 한국 축구의 큰 변화를 이끌었다. 셔틀런 훈련 도입은 이후 한국 축구뿐만 아니라 체육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히딩크는 여전히 한국 축구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받고 있으며, 히딩크의 업적과 조언은 계속해서 많은 이들에게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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