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국은 대한민국의 노동 인권 변호사이자 정치인으로, 민주노동당의 제21대 대통령 선거 후보이자 현 대표이다. 1963년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난 그는 포항제철공업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금속공학과를 졸업한 후, 제41회 사법시험에 합격하며 법조계에 입문했다. 이후 민주노총 법률원장,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노동위원장 등을 거치며 평생을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의 권익 향상에 헌신했다. 법무법인 두율의 고문변호사로도 활동 중이며, 가톨릭 신자로서 세례명은 베드로이다.
그의 경력은 수많은 사회 정의 활동으로 채워져 있다. 김용균 사망사고 특별노동안전조사위원회 간사,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 법률팀장, 세월호 참사 조사 특위위원장, 용산참사 진상규명단 조사팀장 등 대한민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회적 참사 현장마다 그의 이름이 있다. 노동과 인권의 최전선에서 활동해 온 그는 론스타 게이트, 구의역 김군 사건 등에서도 진상 규명과 피해자 권리 회복에 앞장서 왔다. 최근에는 경북노동인권센터 센터장, 정의당 노동인권안전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지역과 중앙을 넘나들며 활동하고 있다.



2025년, 권영국은 민주노동당의 대통령 후보로서 정식으로 정치 전면에 나섰다. 그는 오랜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노동 존중 사회, 안전한 대한민국, 사회 정의 실현이라는 기치를 들고 대중과 소통하고 있다. 풍산그룹 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는 늘 현장을 중심에 둔 리더십을 강조해왔으며, 정치적 이념과 실천을 일치시키려는 흔치 않은 정치인이다. 권영국의 등장은 대한민국의 진보정치가 다시 한 번 뿌리를 다지고 나아갈 가능성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거리에서 피어난 정의의 얼굴, 권영국
어떤 인물은 무대 위에서 조명을 받으며 빛나고, 어떤 이는 그늘진 현장에서 진실을 들춰내며 역사의 숨결을 남긴다. 권영국, 그는 후자다. '거리의 변호사'란 별명이 붙은 것은 단지 그의 활동 반경이 사무실이 아닌 시위현장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한국 현대사에서 억압받는 자들의 곁을 지키며, 법의 바깥에 내몰린 이들의 목소리를 법정 안으로 끌고 들어온 사람이다.



권영국의 삶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배경은 그의 출생이다. 강원도 태백, 광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가난의 언저리에서 생의 무게를 배웠다. 남들보다 먼저 삶의 현실을 직시해야 했던 소년은 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포철공고에 진학했고, 포항제철 엔지니어로 취업했다. 그러나 단지 생계만을 위한 삶에 그치지 않았다.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노조를 만들다 해고되었고, 복직투쟁의 험난한 길에 뛰어들었다. 그는 사측의 탄압, 국가의 탄압, 체포와 구속, 복역을 거치면서도 쉽게 꺾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 모든 체험은 그를 강하게 단련시켰다.
사법시험에 도전한 계기도 단순한 ‘성공’의 열망이 아닌, 억압받는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더 강력하게 대변할 수 있는 무기를 갖기 위함이었다. 10년 만의 해직 인생, 그리고 3년 10개월의 고된 수험생활 끝에 1999년, 그는 마침내 변호사가 되었다. 그러나 권영국은 변호사의 길조차 ‘기득권의 언어’를 배우는 데에 쓰지 않았다. 그는 민주노총 법률원 초대 원장을 맡으며, 자신의 변호사 커리어를 고스란히 거리와 노동 현장에 바쳤다.



쌍용자동차 사태, 구의역 김군 참사, 고 김용균 사망사건, SPC 노조파괴 사건, 세월호 참사… 권영국의 이름은 늘 그 비극의 중심에서 등장했다. 그는 유가족과 함께 울었고, 해고노동자와 함께 농성장을 지켰으며, 구속자와 함께 법정에 섰다. 법정에서의 날카로운 논리만큼이나, 철야농성장에서의 강한 인내도 그에겐 일상이었다. 때로는 경찰에 의해 연행되고, 때로는 체포되기도 했지만, 그는 늘 ‘왜’ 싸워야 하는지를 잊지 않았다.
그가 받은 소송은 그가 해온 변호 활동의 훈장이다. 법을 어기지 않기 위해 법을 공부한 것이 아니라, 법이 외면한 사람들을 위해 법을 부쉈다. 법정에서 경찰의 불법체포에 항의하다 상해 혐의로 기소되었고, 세월호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시위에서 연행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단 한 번도 물러서지 않았다. "돈 없는 사람에게는 법이 멀다"는 현실을 누구보다 절실히 알기에 그는 무료 변론을 마다하지 않았고, 때로는 사무실 운영이 어려워질 정도로 수입을 포기하면서도 자신의 길을 걸었다.



법률가로서 그는 단순히 사건을 수임하고 해결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사건의 구조를 분석했고, 그 구조를 만든 권력과 맞섰다. 그리하여 단지 하나의 분쟁을 해결하는 것이 아닌, 사회 구조 자체를 바꾸려 했다. 그가 ‘거리의 변호사’로 불린 이유다. 책상 너머에서 사건을 처리하지 않았고, 거리 한복판에서 부당함을 바로잡기 위해 시민들과 함께 몸을 던졌기 때문이다.
정치인 권영국의 등장은 자연스러웠다. 그는 법만으로 바꿀 수 없는 한계를 절감했다. 쌍용차 해고 무효 소송의 대법원 판결,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은 그에게 '법은 이기적 권력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현실을 뼈저리게 체감하게 했다. 그래서 그는 시민혁명당을 창당했고, 정의당에 입당해 다시금 국회를 두드렸다. 그의 지역구는 경상북도 경주. 보수의 텃밭이라 불리는 그곳에서 권영국은 노동자, 서민의 정치적 대안을 제시했고, 비록 낙선했지만 두 자릿수 득표율로 정의당의 존재감을 알렸다.



그는 말한다. “운동권의 언더서클에 들어갈 배포도 없었다.” 그 말 속엔 겸손이 있다. 그러나 이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가장 위험한 싸움을 감당해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태도다. '거리의 변호사'란 수식어는 그에게는 찬사이자 무게다. 언제나 거리에서, 약자의 편에서, 억울함의 중심에서 싸워온 그는 지금도 현장에 있다.
정치와 법, 거리와 국회, 변호사와 시민운동가. 권영국은 이 모든 경계를 오가며 싸움의 최전선에 서 있는 인물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는 권영국처럼, 말보다 실천이 앞선 사람들의 삶 속에 있다. 시멘트 바닥에서 무릎을 꿇고,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며, 외로운 싸움을 이어가는 그 모습 안에 있다.



법은 정의를 담기엔 작고, 정치는 그 정의를 실현하기엔 더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영국은 여전히 거리에서 정의를 외친다. 그의 존재는 하나의 상징이다. 법이 배제한 사람들에게 법의 이름으로 다가가는, 정치가 외면한 사람들에게 정치의 이름으로 손 내미는, 이 시대 마지막 ‘거리의 정의’가 살아 있는 이름, 권영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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