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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A 타이거즈 No.71 ★ 이범호. 그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Araboza

시사맨 2024. 5. 6.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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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A 타이거즈의 No.71, 이범호는 1981년 11월 25일에 경상북도 의성군에서 태어났습니다. 대구수창초, 경운중, 대구고를 거쳐 목원대에서 행정정보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이범호는 3루수, 유격수, 2루수, 1루수, 우익수의 다재다능한 포지션에서 활약하며 우투우타로 활약했습니다. 2000년에 한화 이글스에서 프로 입단하여 2009년까지 활약한 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이적했습니다. 이후 2011년부터 2019년까지 KIA 타이거즈에서 뛰었습니다. 은퇴 후에는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 필라델피아 필리스에서 연수코치로 활동한 뒤, 2021년부터는 KIA 타이거즈에서 감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현재는 KIA 타이거즈의 감독직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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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야구의 중요한 역사를 써내려가는 이범호는 현재 KIA 타이거즈의 감독으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그의 야구 선수로서의 경력은 극히 탁월합니다. 내야수로서 뛰며 한화 이글스와 KIA 타이거즈에서 간판 스타로 활약했으며, '꽃범호'라는 별명으로 유명했습니다. 특히 그는 KBO 리그 역사상 최다 만루홈런을 기록하여 '만루의 사나이'로도 불렸습니다. 그의 감독으로서의 역량도 놀랍습니다. 2024년에는 KBO 리그 1군 감독 중 최연소로 임명되었으며, 이는 대한민국 야구사상 이승엽에 이어 두 번째로 300홈런을 넘긴 선수로서의 감독입니다. 이를 통해 그는 한국 야구계의 주목할 만한 인물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한화 이글스와 KIA 타이거즈의 감독으로 현재 야구계에 그 이름을 빛내고 있는 이범호는 그의 야구 인생이 시작될 때, 그다지 주목받는 선수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화 스카우트였던 정영기의 탁월한 안목으로 그의 재능이 발굴되었습니다. 정영기가 2차 1라운드 지명을 할 것이라고 이범호에게 전했을 때, 이범호는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지명을 받자 그는 놀랐다고 합니다.

한화 이글스 구단 관계자들은 "대구 이씨가 왔다!"라며 농담과 진심이 어울린 기대를 표현했는데, 그 이유는 이범호가 당시의 주목받는 선수나 연고지역 선수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2003년쯤 이범호가 주전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그의 존재감이 더욱 부각되었습니다. 특히 당시 아시아 최다홈런을 향해 달려가던 이승엽한테 싸인을 받으러 가는 장면은 스포츠 신문에 실려 그의 인지도를 높였습니다.

 

이범호는 2001년을 기점으로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유격수로 뽑혔지만, 다른 선수들의 존재로 주전으로 자리를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2002년 중반 김태균의 입단을 계기로 3루수 자리를 잡으면서 주전으로서의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후 2004년에는 유격수로 내보내지면서 타율 0.308, 23홈런을 기록하며 주목받았지만, 실책 문제로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2005년 이후로는 3루수로 완전히 정착하며 골든글러브를 수상하고, 2006년에는 1회 WBC에 참가하며 더욱 주목받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3루수 골든글러브를 연속으로 수상하며 2000년대 중후반의 공격형 3루수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의 활약은 야구팬들뿐만 아니라 언론에서도 화려하게 부각되었습니다.

 

2009년 시즌을 마친 후, 한화 이글스를 떠나 자유계약선수(FA)로 나선 이범호. 그는 "적정한 조건만 갖춰준다면 한화에 남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협상기간을 넘기고 결국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 매우 유리한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이에 한화 이글스 팬들은 실망을 감추지 못하고 그를 '월추(월드추남)'라고 농담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소프트뱅크 입단 후, 이범호는 여러 이유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경미한 부상과 수비력 부족 등으로 아키야마 코지 감독의 지적을 받으면서 주전에서 밀려나 대타로 출전하거나 지명타자로 활약했습니다. 소프트뱅크 관계자들이 감독의 의견을 묻지 않고 독단적으로 이범호를 영입했다는 점도 문제였습니다. 그 결과, 팀 내 소통에도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특히 1루수를 보강하고자 했던 감독의 의견과 달리, 이범호의 영입은 감독과의 의사소통이 부족한 상황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로 인해 감독은 불안정한 상황에 처했고, 팀의 수비력 역시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이범호는 주전 자리를 찾지 못하고 팀 내에서 불안정한 위치에 머물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2010 시즌에는 출전 기회가 제한되었고, 시즌 종료 후에는 팀과의 계약이 불안정한 상태였습니다. 한화로 복귀를 시도했지만 결국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이후의 거취는 불분명했습니다. 소프트뱅크를 떠난 후에도 이범호는 기억에 남는 플레이를 펼쳤습니다. 특히 2010년 5월 7일 경기에서 와쿠이 히데아키의 노히트 노런을 저지한 일은 많은 이들에게 기억됩니다.

 

그러나 이범호가 입단할 때 팀에 이미 '이'씨가 있었기 때문에 유니폼 마킹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이후 다시 소프트뱅크를 떠나면서 이범호는 'LEE'로 회귀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이범호의 일본행은 다양한 어려움과 복잡한 상황 속에서 이뤄졌습니다.

 

이범호의 KIA 타이거즈 시절은 그의 야구 인생에서 이정표가 되는 순간 중 하나였습니다. 2011년 1월 27일, 소프트뱅크를 떠나 KIA 타이거즈에 입단한 그의 결정은 한국 야구계를 뒤흔들었습니다. 이번 이적에는 다채로운 이면이 있었습니다. 소프트뱅크가 2011년 시즌에 대한 연봉 1억 엔을 제공하면서 이를 무조건적으로 풀어준 것은 놀랍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범호가 한화로 가지 않은 것은 한화 팬덤과 KIA 팬덤을 모두 놀라게 했습니다.

 

KIA와의 계약은 계약금 8억, 연봉 4억으로 총 12억 원이었습니다. 이범호는 1월 29일 KIA 타이거즈의 스프링캠프에 합류하여 시즌 준비에 착수했습니다. 그러나 한화의 보상선수 지명권 문제와 관련하여 KBO의 규약 109조가 논란이 되었고, 한화는 안영명을 보상선수로 지명하며 이를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이범호 본인은 KIA 입단에 대해 신중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어려울 때 KIA가 손을 내밀었다"는 그의 말은 협상의 어려움을 암시했습니다. 이에 대한 언론 보도와 팬들의 관심이 뜨거웠습니다.

2011년 시즌은 이범호에게 많은 도전과 어려움을 안겨주었습니다. 부상으로 인한 이탈과 재활 과정은 그의 힘겨운 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고 복귀한 그의 모습은 희망의 빛으로 다가왔습니다. 그가 클린업의 역할을 맡으며 팀을 이끌었고, 부상의 재발을 우려하여 자제하는 모습은 그의 전문성을 입증했습니다.

 

하지만 부상은 그를 계속해서 괴롭혔고, 결국 시즌 종료까지 1군에서 경기를 뛰지 못했습니다. 이로 인해 일부 팬들의 비판을 받았지만, 그는 재활에 최선을 다하며 팀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이범호는 절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인내와 노력은 그가 후에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감독 자리까지 올라가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KIA 타이거즈 시절은 그의 야구 인생에서 빛나는 장면 중 하나로 기억될 것입니다.

 

2014년, 삼성 라이온즈와의 개막전에서 이범호가 기록한 활약은 그가 KBO에서 새로운 장을 열었음을 선언하는 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1회초, 2루 주자를 기회로 삼아 쳐낸 적시타는 단순한 하나의 점수가 아니었다. 이는 그의 KBO 복귀를 알리는 장식적인 순간으로, 한 선수의 귀환과 함께한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을 암시했다.

 

이후의 경기들에서도 그는 지금까지의 역량을 증명했다. LG 트윈스와의 경기에서의 만루홈런, 롯데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의 투런홈런 등은 그가 어떤 상황에서도 빛을 발하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활약으로 그는 팀의 중요한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그의 존재감은 팀 내외에서 크게 느껴졌다.

 

2015년에는 전반기의 부진을 후반기의 강렬한 활약으로 덮어씌웠다. 그는 팀 내 타자 WAR에서 1위를 차지하는 등 팀을 이끌었고, 그 해 시즌을 마무리한 후에는 FA 자격을 얻어 재계약 협상에 나섰다. 이 벅찬 협상 과정을 거쳐, 그는 KIA 타이거즈와 3+1년 계약을 맺었으며 이로써 그의 미래는 한 팀과 함께할 것임이 결정되었다.

 

하지만, 2018년은 그에게 어려움이 많은 시즌이었다. 부상과 수비의 미흡함으로 인해 그는 힘든 시기를 보냈고, 그의 활약은 예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강인한 의지와 열정으로 팀을 위해 노력했고, 때로는 빛나는 순간도 있었다. 넥센전에서의 홈런을 통해 그의 가치와 능력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이범호는 그의 경력 동안 많은 변화와 도전을 겪었지만, 그는 여전히 KBO의 한 터 중심에 서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그의 앞으로의 도전과 성장을 기대하는 이들은 많다.

2019 시즌, 꽃범호의 마지막 무대

 

2018 시즌이 마무리된 후, 이범호의 3+1 옵션 발동 소식은 많은 야구 팬들에게 충격을 안겼다. 특히, 구단 관계자의 발언에서 이범호의 상황을 짐작케 했던 것은 이 구단의 모랄 상태를 드러내는 대목이었다. 타격의 한 방은 인정되지만, 배트 스피드가 떨어지고 수비 범위가 한계에 이르자 팬들은 다시 한 번 범땅범안의 시즌을 예상했다. 게다가 리빌딩을 위해 다수의 3루수 후보가 나왔지만, 황대인이 가장 유력한 후보였으나 부상으로 인해 걱정되는 상황이었다.

 

허벅지 부상과 이어진 햄스트링 통증으로 스프링캠프를 놓치게 된 이후, 이범호의 상황은 더욱 암울해졌다. 그는 주로 지명타자나 대타로 출전하며 몸 상태가 회복되기를 기다렸지만, 팀의 상황과 경쟁자들의 활약으로 인해 1군에서의 입지는 좁아졌다. 결국 감독은 5월 1일 이범호를 1군 엔트리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했다.

 

현재까지도 3루는 최원준과 박찬호가 활약하고 있으며, 나지완은 지명타자 겸 오른손 대타로 활약하며 외야 수비도 가능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범호의 등록은 어려운 상황이며, 그의 은퇴는 더 가까워 보인다.

 

결국 6월 18일, 이범호는 프런트에 은퇴 결정을 통보했다. 하지만 예우 차원에서 2000번째 경기를 채우기 위해 7월 중에 1군에 콜업되어 2000번째 경기를 치를 예정이며, 은퇴식은 7월 13일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에서 열릴 예정이다.

 

은퇴 발표 이후, 이범호는 1군 등록 없이 팀과 함께 훈련하고 있으며, 임시 주장직을 맡기도 했다.

 

7월 13일, 그의 마지막 경기는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로, 그는 3루수로 선발 출전했다. 모든 코칭 스태프와 선수들은 그를 기리는 은퇴 기념 유니폼을 착용하며 그의 마지막 무대를 함께했다. 이범호는 그의 20년을 담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은퇴 이후, 이범호는 2019 KBO 올스타전에서 나눔올스타 1루 주루 코치로 잠시 등장했으며, SBS Sports 중계석에서도 특별 게스트로 출연했다.

 

이범호의 국가대표 경력은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빛났다. 2006년 대회에서는 주전 3루수로 활약하여 팀의 성적 향상에 기여했으며, 2009년 대회에서는 공식 올스타 팀에 선정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이범호는 특히 2009년 대회에서 괴물같은 활약을 하며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준우승에 공헌했다. 이후에도 정규 시즌에서의 활약을 통해 그의 가치를 입증했다.

 

2019 시즌은 이범호의 마지막 시즌이자 그의 끝나지 않은 야구 인생에서 한 장을 닫는 시점이었다. 그의 이야기는 한 시대의 끝을 의미했으며, 야구팬들은 그의 행적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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