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웅천은 대한민국의 전직 야구 선수이자 현직 코치로, 1971년 3월 17일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났다. 광주남초등학교, 무등중학교, 순천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조웅천은 1989년 태평양 돌핀스에 연습생으로 입단하며 프로 야구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1990년 2차 5라운드로 태평양 돌핀스에 정식 입단하여, 선수로서의 경력을 이어갔다. 우완 투수로 활약한 조웅천은 태평양 돌핀스와 현대 유니콘스, SK 와이번스 등에서 오랜 기간 동안 활동하며 팀의 주요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조웅천의 코칭 경력은 조웅천의 선수 생활만큼이나 다양하고 풍부하다. 2010년 시카고 컵스에서 연수코치로 시작하여, SK 와이번스의 2군 투수코치와 1군 불펜코치를 거쳐 1군 투수코치로 활동하며 코치로서의 역량을 쌓았다. 이후 두산 베어스, 롯데 자이언츠, SSG 랜더스 등 여러 팀에서 1군과 2군 투수코치로 활동하며 많은 선수들을 지도했다. 특히, 조웅천은 2024년 두산 베어스의 1군 투수코치로 복귀한 뒤 현재는 2군 투수코치로 활동하고 있다. 조웅천의 가족으로는 아들 조승원이 있으며, 조웅천의 야구 인생은 선수로서, 그리고 코치로서 많은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프로 야구에서의 풍부한 경험과 지도자로서의 탁월한 능력을 바탕으로, 조웅천은 앞으로도 한국 야구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조웅천: 아마추어 시절
조웅천은 처음 야구를 시작할 때 유격수로 활동했으나, 키가 작다는 이유로 광주상고 진학에 실패하였다. 이후 일반 학생으로 진학했지만 어려운 현실 속에 자퇴를 결심하게 된다. 이후 지인의 소개로 순천상고에 입학하여 1학년부터 다시 야구를 시작하였으며, 학력 문제로 인해 2학년 때 3학년으로 승급하는 일이 있었다. 순천상고 야구부는 당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는 팀이었으나, 조웅천은 감독의 권유로 투수로 전향해 사이드암 투구법을 익히며 나름 괜찮은 성적을 거두었다. 그러나 3학년 때 슬라이딩 도중 어깨 부상을 입어 대학 진학이 어려워지자, 태평양 돌핀스에서 테스트를 받게 되었다. 테스트 후 연락은 없었으나 실업팀과의 2군 경기에서 좋은 투구를 선보여 태평양과 연봉 600만원에 연습생 계약을 체결하였다.
프로 시절: 태평양 돌핀스와 현대 유니콘스
1990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태평양 돌핀스의 2차 5라운드에 지명된 조웅천은 그해 프로에 정식으로 입단하였다. 첫 해에는 2경기 3이닝 2실점으로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으나, 1994년 시즌 후 정리 대상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봄과 가을에 좋은 성적을 보인 덕분에 팀에 남게 되었고, 1995년부터 패전 처리 투수로 자리를 잡으며 점차 기회를 얻었다. 특히 6월 15일 프로 첫 승을 올리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태평양에서 현대 유니콘스로 팀이 인수되면서 중간 계투로 활약하게 되었고, 1996년에는 68경기에 출전해 방어율 2.11을 기록하며 팀의 한국시리즈 진출에 기여하였다.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는 연장 10회말 위기 상황에서 등판해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팀의 승리를 이끌어내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성장과 새로운 도전
1997년부터 1999년까지 조웅천은 꾸준히 좋은 성적을 유지하였으나, 방어율이 점차 높아지고 소화 이닝이 줄어드는 위기를 맞았다. 이에 조웅천은 새로운 구종 개발을 통해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하였고, 1999년 오릭스 가을 캠프에서 서클 체인지업을 완벽하게 익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2000년 시즌에는 74경기에서 94.1이닝을 소화하며 홀드 1위(16개)를 기록하였고, 팀의 허리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러나 2000년 한국시리즈에서는 무리한 기용으로 인해 지친 상태에서 두산 타자들에게 난타를 당하며 아쉬움을 남겼다. 조웅천의 이러한 경험들은 이후 코치로서 선수들을 지도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되었으며, 조웅천의 야구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제공하였다.
조웅천의 SK 와이번스 시절
조웅천은 2001년 시즌 전, SK 와이번스로 트레이드되며 인천으로 돌아오게 된다. SK 와이번스는 2000년에 창단된 신생 팀으로, 전력을 보완하기 위해 우승팀과 준우승팀에서 보호선수 외 선수를 현금 트레이드하는 지원책을 마련하였다. 조웅천은 조규제와 함께 현대 유니콘스에서 SK 와이번스로 이적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많은 감정적 충격을 받았다. 미국 전지훈련 중이던 조웅천은 2월 9일에 트레이드 소식을 듣고 짐을 싸서 SK의 전지훈련지인 시드니로 합류하였다.
트레이드 첫 해인 2001년, 조웅천은 방어율 5.63을 기록하며 프로 생활 최악의 성적을 거두었다. 그러나 2002년에는 56경기에 출장해 82.2이닝을 소화하며 방어율 3.27, 9승 5패 6세이브 5홀드를 기록하며 성적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2003년에는 마무리 투수로서 65경기에서 77.2이닝을 소화하며 평균자책점 1.97, 6승 5패 30세이브 2홀드를 기록해 구원왕에 올랐다. SK 와이번스는 그해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준우승을 거두었으며, 시즌 후 FA 자격을 얻은 조웅천은 SK와 4년 총 17억 5000만원에 재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2003년 11월 삿포로 아시아선수권 겸 2004 아테네 올림픽 아시아 예선에서는 대만전과 일본전에서 부진을 겪으며 아쉬운 결과를 남겼다. 국가대표 선발과정의 문제와 연습 부족 등이 원인이었으나, 조웅천에게는 유일한 국가대표 경기가 되어 기억에 남는 순간이 되었다. 2004년부터 다시 중간계투로 복귀해 필승계투로 활약했지만, 점점 노쇠화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2006년에는 부상으로 선발로 등판하기도 했다.
성장과 재도약
2007년 김성근 감독의 부임 후 조웅천은 새롭게 일신하며 정대현과 함께 더블 스토퍼로 맹활약하였다. 64경기에서 74.2이닝을 소화하며 방어율 1.57, 2승 3패 9세이브 16홀드를 기록하며 SK의 첫 페넌트레이스 우승과 첫 한국시리즈 우승에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시즌 중 김성근 감독이 조웅천을 좌익수로 기용하는 등 논란이 일기도 했다. 2007년 시즌 종료 후 두 번째 FA 자격을 얻은 조웅천은 SK와의 협상이 결렬될 위기에 처했으나, 2년 총 8억원에 계약하며 극적으로 팀에 잔류했다.
마지막 시즌과 은퇴
2008년 8월 27일, 조웅천은 800경기 등판을 달성하며 생애 첫 타점을 기록하는 등 의미 있는 순간을 맞았다. 그러나 오른 엄지손가락 부상과 어깨 부상으로 인해 2008년과 2009년에는 제대로 된 활약을 하지 못했다. 결국 팔꿈치와 어깨 통증으로 인해 은퇴를 결정하게 되었다. 2010년 3월 28일, 정경배와 함께 문학구장에서 은퇴식을 가졌으며, 현역 시절 입었던 유니폼과 글러브는 인천 SSG 랜더스필드의 L's 갤러리 레전드 플레이어 존에 전시되었다. 이는 2022년 박물관이 폐관될 때까지 많은 팬들에게 기념될 만한 전시였다.
조웅천: 평가
조웅천은 비록 인천 출신은 아니지만, 박재홍과 함께 인천 야구의 상징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조웅천은 KBO 리그 역사상 최고급 불펜 투수 중 하나로 손꼽히며, 한용덕과 김상진에 이어 또 다른 연습생 신화를 쓴 선수로 유명하다. 그러나 한용덕과 김상진이 현역 시절 '무관의 제왕'으로 불렸던 것과 달리, 조웅천은 두 차례 타이틀 홀더로서 빛을 발했다. 조웅천은 13년 연속 50경기 출장 기록과 KBO 투수 최다경기 출장 기록(813경기)을 세웠으며, 이는 조웅천의 꾸준한 활약을 증명하는 중요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조웅천의 커리어는 중간계투의 특성상 누적 기록에서 특별한 것이 없지만, 조웅천의 813경기 출장이라는 기록(역대 2위)은 조웅천의 경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만약 홀드 기록이 KBO에 도입된 2000년 이전부터 집계되었다면, 조웅천의 홀드 기록은 100개를 훌쩍 넘겼을 것이다. 이는 조웅천이 얼마나 많은 경기에 등판하며 팀에 기여했는지를 잘 나타내준다. 조웅천의 이런 경력 덕분에 조웅천은 KBO 리그에서 중간계투 투수로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조웅천의 꾸준함은 13년 연속 50경기 출장이라는 기록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는 KBO 리그에서 조웅천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를 보여준다. 조웅천의 출장 기록은 2위인 류택현의 소화 이닝인 560이닝과 비교할 때 두 배 이상의 차이가 난다는 점에서도 조웅천의 팀 공헌도가 컸음을 알 수 있다. 아쉽게도 100세이브와 100홀드 달성에는 각각 2개와 11개가 부족했지만, 이는 조웅천이 얼마나 오랫동안 팀의 핵심 불펜 투수로 활약했는지를 부인할 수 없는 증거이다.
피칭 스타일
조웅천의 피칭 스타일은 주로 서클 체인지업에 의존한 것이 특징이다. 조웅천의 공은 130km/h 초중반대의 구속으로 빠른 편은 아니었지만, 조웅천은 전형적인 제구력으로 승부하는 선수였다. 조웅천의 주력 구종은 싱커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팔에 부담이 덜 가는 체인지업이었다. 이는 조웅천이 오랜 기간 동안 꾸준히 활약할 수 있었던 비결 중 하나였다. 조웅천의 이런 피칭 스타일 덕분에 조웅천은 롱런하며 KBO 리그에서 오랜 기간 동안 뛰어난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조웅천의 경력과 피칭 스타일은 조웅천이 얼마나 뛰어난 중간계투 투수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조웅천의 꾸준한 성적과 팀에 대한 기여는 많은 팬들과 동료들에게 기억될 것이며, 인천 야구의 프랜차이저로서의 조웅천의 위치는 앞으로도 계속 빛날 것이다.
조웅천: 지도자 경력
SK 와이번스 1기
조웅천은 시카고 컵스에서 연수를 마친 후 2011 시즌부터 SK 와이번스의 코치로 영입되면서 지도자 경력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2군 투수코치로 시작했으나, 시즌 중 코칭스태프의 보직 변경으로 1군 불펜코치로 승격되었다.
2013년 1월 17일 부친상을 당한 후에도 2013년까지 불펜코치로서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2014 시즌 1군 투수코치로 부임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이만수 감독의 과도한 투수 혹사를 방관했다는 비판을 받았고, 특히 불펜 투수들의 부진과 과도한 기용에 대해 많은 비난이 쏟아졌다. 이러한 비판 속에서도 조웅천은 팀 상황을 변호하려 했으나, 팬들의 불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2015 시즌에는 2군 투수코치로 다시 보직을 옮겼다가, 2016 시즌을 앞두고 다시 1군 불펜코치로 복귀하였다. 그러나 2016년 말에는 한화 이글스의 투수코치로 합류할 예정이었으나, 최종적으로 거절당하면서 SK를 떠나게 되었다.
두산 베어스 1기
2016년 12월 1일, 조웅천은 두산 베어스의 코치로 영입되었다. 2군 투수코치로서 박치국과 전용훈 등을 집중적으로 지도하며 투수 육성에 힘썼다. 두산에서 조웅천이 키운 투수들은 2019년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롯데 자이언츠
2019 시즌 후, 조웅천은 허문회 감독 체제로 새롭게 출범한 롯데 자이언츠의 코칭스태프로 영입되었다. 보직은 1군 불펜코치였다. 불펜코치로서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선수들에게 배팅볼을 던져주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팀에 기여했다.
2020년 8월 2일, 조웅천은 1군 엔트리에서 말소되었으나, 불펜에서 계속 선수들을 지도했다.
SK 와이번스-SSG 랜더스 2기
2020년 11월 7일, 조웅천은 SK 와이번스의 코치로 다시 영입되었다. 이번에는 1군 투수코치로서 김원형 감독과 호흡을 맞추게 되었다. 그러나 불펜의 부진과 투수 운용 문제로 인해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다. 2022년 한국시리즈에서 SSG 랜더스가 통합 우승을 차지하면서 코치로서 처음으로 우승 반지를 얻었지만, 2023년에는 투수진의 부진으로 인해 2군 투수코치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두산 베어스 2기
2023년 10월 28일, 조웅천은 두산 베어스의 1군 투수코치로 합류하였다. 그러나 시즌 초반부터 불펜진과 선발진이 붕괴하면서 팀 순위가 하락하였다. 결국 2024년 5월 3일, 조웅천은 2군 투수코치로 보직 이동하였고, 조웅천의 자리는 박정배 코치가 대신 맡았다. 이후 두산은 투수진의 안정화를 이루며 연승을 거두었다.
조웅천의 지도자 경력은 다양한 팀에서의 경험과 여러 보직 변경을 통해 조웅천의 지도력과 전략을 다듬어왔다. 비록 여러 어려움과 비판을 겪었지만, 조웅천의 꾸준한 노력과 열정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인정을 받고 있다.
중간계투의 중요성과 조웅천의 주장은?
중간계투의 중요성에 대한 조웅천의 주장은 오랜 야구계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깊이 있는 통찰력을 보여준다. 조웅천은 선발 투수와 마무리 투수보다 상대적으로 무시받는 중간계투의 처우 개선에 대해 지속적으로 목소리를 높여왔다. 현대 야구의 분업화된 투수 등판 체계 속에서 중간계투는 선발과 마무리를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그러나 등판 일정이 고정된 선발이나 이닝이 정해진 마무리와 달리, 중간계투는 언제, 어느 상황에서든 등판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은 더욱 부각된다.
조웅천은 이러한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중간계투로서의 롱런을 위해 어깨 보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조웅천은 연습 투구 하나하나의 소중함을 강조하며, 소모되는 어깨를 보호하기 위해 투구 횟수를 줄이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역설했다. 또한, 부상을 줄이기 위해 트레이닝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중간계투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방법론을 제시했다.
조웅천은 메이저리그에서 빌리 빈의 머니볼 이론을 예로 들어 불펜 투수를 소모품으로 여기는 현실을 비판했다. KBO 리조웅천은 미국과 달리 선수 자원이 한정되어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안정적인 리그 운영을 위해서는 불펜 투수의 처우 개선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조웅천의 개인적 배경과 중간계투로서의 특화
조웅천의 아버지는 중학교 때까지 축구선수로 활동했지만, 운동선수의 힘든 삶을 경험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조웅천이 야구를 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러나 조웅천은 자신의 지론에 맞게, 공 두 개만 던져도 몸이 풀리는 중간계투로 특화된 신체를 가지고 있었다.
조웅천의 아들 조승원도 효자다. TV 프로그램 '불타는 그라운드'에서 아들이 비디오 게임 '마구마구'를 할 때, 1회말에 다니엘 리오스를 2003년도의 아버지로 교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조웅천은 이 상황에서도 자신이 나왔으니 다 이긴 경기라며 농담을 할 정도로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였다. 조승원은 농구선수로서 양정고 농구부를 거쳐 경희대로 진학했고, 2022년 전체 3라운드 7순위로 고양 캐롯 점퍼스에 입단했다. 그러나 팀의 재정 문제로 인해 고통받기도 했고, 이후 군입대를 하게 되었다.
롯데 자이언츠 팬들에게 남긴 이미지와 코치로서의 활약
조웅천은 롯데 자이언츠 팬들에게는 다소 좋지 않은 이미지를 남기기도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롯데 자이언츠의 코치로 부임하게 되었다. 조용준, 조용훈과 함께 현대 출신 3대 "조" 중 하나로, 실제로 이들과 같이 뛴 적은 없지만 그와 같은 세대의 대표적인 투수로 손꼽힌다.
조웅천의 지도자 경력은 다양한 팀에서의 경험과 보직 변경을 통해 조웅천의 지도력과 전략을 다듬어왔고, 비록 여러 어려움과 비판을 겪었지만, 조웅천의 꾸준한 노력과 열정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인정을 받고 있다. 조웅천이 주장하는 중간계투의 중요성과 처우 개선에 대한 필요성은 KBO 리조웅천의 발전과 지속 가능한 운영을 위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사안이다.